전체적인 감상
노벨상 문학상(2017년)과 부커상(1989년, 남아 있는 나날)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단편소설집 녹턴(발표:2009년)은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Nocturnes: Five Stories of Music and Nightfall)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부제처럼, 작품에 나오는 음악과 사건들은 하루가 저물 때, 그리고 인생이 저물어갈 때 찾아오는 사랑과 관계의 슬픈 끝자락을 느끼게 한다.
다섯 편의 이야기 중 네 편에는 젊은 음악가와 노년의 인물이 함께 등장한다. 젊은 음악가들 ― 『크루너』의 얀, 『몰번 힐스』의 화자, 『녹턴』의 스티브, 『첼리스트』의 티보르 ― 은 공통적으로 재능은 있으나 성공하지 못해 경제적 불안을 겪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에 의심을 품고 있으며, 꿈을 이루지 못할 미래를 두려워한다.
반면 이들과 대조되는 인물들 ― 『크루너』의 토니 가드너, 『몰번 힐스』의 틸로와 소냐, 『녹턴』의 린디 가드너, 『첼리스트』의 엘로이즈 매코믹 ― 은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과거의 영광과 사랑에 미련을 품거나 이를 되찾으려 애쓰는 이들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단편적인 모습은 나의 젊은 시절과 현재의 모습을 오버랩시킨다. 책을 읽으며 안타까움과 슬픔이 교차했다
한때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을 때는 “밑바닥 단계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완전한 부패까지는 아니라도 극도로 천박하고 불순한 것이 있다”(130)는 식의 오만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불안을 느낄 때는 “오늘 연주 참 좋았소, 친구. 당신에게 멋진 터치가 있소”(53)라는 말을 간절히 원한다. 잘나가는 친구들을 보면 “그 친구 제이크 마벌이 내일 이 호텔에서 큰 상을 받는다는군요. 올해의 재즈 뮤지션으로 선정돼서 말이에요. 미친 짓 아닙니까?”(214)라며 괜히 흥분하기도 한다.
또,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느끼며 느슨해진 시기에는 “네가 지닌 잠재력을 생각해 볼 때 부끄럽지 않니? 네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좀 봐!”(71)라는 핀잔도 들어야 하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며 점점 떠나보내야 할 사람과 관계들을 마주하게 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들. 그래서 여전히 “아니,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50)라고 말하고 싶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너무 늦어 버리기 전에 출구를”(51) 찾으라고 말한다. 출구는 새로운 관계 또는 사랑을 찾는 것인데, 과거의 빛이 꺼져가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하면서도 내면 깊은 곳의 공허와 외로움을 감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뭔가를 더 하고 싶으면서도, “난 배우는 것도 좋아하지. 하지만 이젠 좀 늦은 것 같소.(304)” 아니면 바쁘지 않으면서도 “난 바쁜 사람(304)”이라는 핑계로 새로운 도전을 주저한다. 때론 한다면 잘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첼로의 천부적 재능을 가졌다고 여기면서도 실제로는 배워볼 용기를 내지 못한 엘로이즈처럼 결국 실행하지 않는 소망으로 남겨두고 있다.
그래서 결국, 황혼의 시간에서는 사랑도 재능발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꽤 신중하게 보호막을 쌓아두었거나, 심각하게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꿈을 이루는 건 불가능”(가디언지 인터뷰)하다는 것을 알아서 이제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890년, 57세가 된 요하네스 브람스는 친구에게 자신의 작곡가로서의 경력이 아마 끝났다고, 이제 충분히 했다고 말했다. 그 이듬해 그는 유언장을 썼다. 그러나 1897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마지막 창작의 불꽃을 태우며 독주 피아노를 위한 네 개의 짧은 곡집(Op.116~119)을 작곡했다.
이 곡들에는 내향적이고, 조용하며, 사색적인 음악이 담겨 있다. 말 없는 다정하고 친밀한 노래와도 같은 곡이다. 죽음이 가까웠던 시기에 쓴 이 곡들에는 가을 같은 정서, 마치 모든 것이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배어 있다. 그리고 아직도 사랑한다고 옛 연인에게 고백하지 않는 것, 돌아보되 머무르지 않는 것, 그리고 살짝 떨리는 채로 굳게 다문 입술 같은 느낌의 음악이다.
브람스처럼, 인생에 황혼에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재능으로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도록 마지막 창작의 불씨를 계속 찾아 도전해 보는 것이 좋겠다.
나에게 인상 깊었던 문장
| 크루너 | 29 조금 전처럼 내가 지나가는 배에 타고 있다면, 혹시 나를 알아본다 하더라도 그들이 흥분할 것 같소? 아닐 거요. 그들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지도, 촛불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중단하지도 않을 거요. 왜 그러겠소? 이제 한물간 ‘딴따라’ 때문에 말이오. |
| 31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그 음악을 들을 청중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다만 마음속에서 전날 만났던 청중과 현재의 청중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오. | |
| 50 컴백이란 쉬운 게임이 아니라오. 많은 변화에 대처해야 하고 그중에는 무척 힘든 것들도 있소. 현재의 존재 방식을 바꿔야 하는 거요. 나아가 사랑하는 것들까지 바꿔야 할 경우도 있소. | |
| 비가 오나 해가 뜨나 | 124 내가 좋은 친구라니 나도 기뻐. 왜냐하면 나는 뭐 잘하는 게 없으니까. 실제로 난 쓸모없는 인간이야.“”그런 말 하지 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넌 참 좋은 친구야. 레이먼드.“ |
| 몰번힐스 | 174 사실 젊었을 때 나는 어떤 것에도 화를 내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많은 것들에 화가 난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좋은 게 아니죠. |
| 175 틸로가 여기에 오면, 아마 당신에게 말하겠지요. 결코 용기를 잃지 말라고요. 그 사람은 당연히 이렇게 말하겠죠. 런던으로 가서 밴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고요. 당신은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고요. 그게 바로 틸로가 당신에게 할 말이에요. | |
| 175 나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잚고 재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난 확신할 수 없어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인생에서 많은 실망을 만나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그런 꿈을 갖고 있다면… | |
| 녹턴 | 190 이제 내 얼굴에는 뭔가에 살짝 사로잡힌 듯한 모습, 그러니까 드 니로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나 마약으로 피폐해지기 전의 쳇 베이커의 모습에 깃든 무엇인가가 가미되어 있으리라. |
| 262 아마도 그녀의 말처럼 내게는 어떤 균형감이 필요하고, 삶은 한 사람만 사랑하기에는 너무 큰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일은 내게 정말로 중요한 전기가 되고 성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
| 첼리스트 | 282 나는 문득 뭔가를 깨달았어요. 아직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정원 같은 게 저 멀리 있었어요. 그 사이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죠. 처음으로 안 거예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정원이 있다는 걸요. |
생각 나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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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턴》은 감정이 세월에 따라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절제되면서도 장난기 어린 가벼운 성찰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하루가 저무는 순간, 혹은 우정이나 사랑이 끝나는 순간의 슬픔을 담고 있다. 나이 들어가는 고통은 부드럽게 초점이 흐려진 채 묘사된다. 일부 인물들은 흐르는 세월을 상대로 겉으로만 싸우지만, 결국 피할 수 없는 진짜 비극은 허비된 기회들, 희미해져가는 꿈이다.
Q :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소감은? - “이윽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가드너는 자신이 그러라고 해 놓고도 그녀의 그런 모습에 실망한 것 같았다. 그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노래를 시작하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44)”
Q : 토니는 린디와의 관계를 되살리기 위해 마지막 세레나데를 준비하지만, 정작 춥다고 방안으로 들어가는 린디를 본 순간에 실망과 망설임을 드러냅니다. 이 장면에서 나타난 린디의 행동과 토니의 심정에 대한 생각은? - “네가 파티에 갔다고 해 보자, 댄스파티에 말이야. 느린 댄스 곡이 나오고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누군가와 함께 라면, 그 방의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의미가 없어야 마땅해. 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지 않아. 그냥 그렇지가 않은 거야. 어떤 남자라도 지금 안고 있는 남자의 절반에도 못미친다는걸 알고 있어. 그런데도…..음, 방 안에 있는 다른 남자들이 여전히 눈에 들어오는 거야. 그들이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질 않아. 관심을 끌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손짓을 하고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 같다고…..(중략)…그러고 나면 상황이 엉망이 되어서, 지금 안고 있는 남자와 조용히 춤을 출 수가 없는 거야. (121~122)”
Q : 이 문장은 찰리와 에밀리 부부의 어색한 관계에 영향을 주는 에밀리의 내면적 혼란이라고 판단된다. 에밀리는 진정 원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조차도, 왜 여전히 외부의 시선이나 가능성에 흔들리며, 집중된 감정이 외부에 의해 분산되는 경험을 반복할까? - “우리 그만 끝내자고요. 우리는 이제 그 어느 것에도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다고요. ‘그래, 여보. 당신과 나는 이제 끝난거야.’ 그런 다음 가 버렸어요! (173)”
Q : 틸로와 소냐는 생활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다. 틸로는 끊임없이 쾌활하며, 항상 자신들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모든 것이 얼마나 훌륭하게 풀렸는지 자랑스럽게 말한다. 반면 소냐는 모든 것을 좋게만 보는 허구 속에서 문제에 대해 눈감는 것을 거부하며 분노한다.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과 사실적 시선, 틸로와 소냐가 의견을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 “정말로 재능있는 사람, 그런 식으로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을 만나면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잘 모르지만 그저 질투 같은 거죠. 평범한 여자들이 미녀에게 보이는 반응과 비슷하죠. 아름다운 여자가 그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오면 그들은 몹시 싫어하죠. 그 여자를 깎아내리고 싶어진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내가 바로 그렇게 돼요. 특히 그런 상황이 예기치 않게 일어났을 때는 더욱 그런데, 오늘이 바로 그랬어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내 말은, 거기 앉아 있는 당신을 평범한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음 순간 갑자기 당신이…그러니까 뭔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거예요. (223)”
Q : 린디는 스티브의 음악을 듣고 좋아하지 않은 척, 감동하지 않은 척 행동을 했다. 예전 음악가(토니, 얀)에 대한 린디의 태도는 스티브와 다르다.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 “열한 살 이후로는 첼로에 손을 댄 적이 없어요. 엄마에게 로스 선생님과는 더 이상 수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한 그날 이후로 말이예요. 그리고 엄마는 이해하셨어요.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데 동의하셨어요. 내 재능을 손상시키지 않는 게 중요했으니까요.(298)
Q : 실현되지 않은 재능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엘로이즈는 자기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스스로 거장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녹턴》은 감정이 세월에 따라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절제되면서도 장난기 어린 가벼운 성찰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하루가 저무는 순간, 혹은 우정이나 사랑이 끝나는 순간의 슬픔을 담고 있다. 나이 들어가는 고통은 부드럽게 초점이 흐려진 채 묘사된다. 일부 인물들은 흐르는 세월을 상대로 겉으로만 싸우지만, 결국 피할 수 없는 진짜 비극은 허비된 기회들, 희미해져가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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