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시 모음
서덕준 “아침의 단막극”
아침의 단막극 서덕준 동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흔들리는 들풀과 어귀의 꽃잎들이 모두 네게로 불어오면 좋겠다 아침 안개는 너의 가는 길에 은빛 카펫이 되고 새의 지저귐은 너를 깨우는 자그마한 연주가 되면 좋겠다 달이 잠시 무대의 뒤로 사라지고 화려한 단막극이 시작되듯 쏟아지는 햇볕이 너의 하루를 비추기 시작하는 이 순간 이처럼 너의 아침이 항상...
최하림 “시간의 잠”
시간의 잠 최하림 비 오는 날 시냇가 찻집에서 차 마시며 머언 사람의 얼굴 천천히 그리고 있을 때 나는 잠들리라 잠들면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아련히 들으리라 시간들이 문을 밀고 또 밀고 사라져가는 저편 언덕으로 연둣빛 새가 날고 비 온다고 비 온다고 젊은 사람들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걸어가는 그렇게도 어여쁜 걸음으로 오오 어여쁜 걸음으로 걸어가는,...
송영희 “사월”
사월 송영희 이제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시 만난 날들이 기척 없는 바람에도 저렇게 꽃잎은 흩날려 떨어지는데 꽃들이 피고 잎들이 지고 내 생애의 불꽃들도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이별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눈부실수록 빨리. Image : Pixabay 이 시를 읽으니 흐드러지게 피었다 날리듯 떨어지는 공원의 벚꽃나무 아래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정연복 “봄날의 사랑 이야기”
봄날의 사랑 이야기 정연복 사랑은 장미처럼 활활 불타지 않아도 좋으리 사랑은 목련처럼 눈부시지 않아도 좋으리 我们的 사랑은 봄의 들판의 제비꽃처럼 사람들의 눈에 안 띄게 작고 예쁘기만 해도 좋으리 우리의 사랑은 그저 수줍은 새색시인 듯 산 속 외딴곳에 다소곳이 피어 있는 연분홍 진달래꽃 같기만 해도 좋으리 이 세상 아무도 모르게 우리 둘만의 맘속에서만...
김규동 “만남”
만남 김규동 목련꽃이 피면 온다더니 하얀 신작로길 타박타박 걸어서 온다더니 개울을 건너고 양지바른 산굽이를 개암나무 냄새 맡으며 온다더니 만나기 전부터 넘치는 눈물 먼 길 하염없이 걸어서 목련꽃 필 때는 까만 눈동자 빛내며 온다더니 목련꽃 흰 그림자 속에 터널처럼 뚫린 빈 하늘 하나. Image source: Pixabay 목련꽃이 필 때면 찾아오겠다는...
나해철 “봄날과 시”
봄날과 시 나해철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 보이고 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있는데 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 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Image : Pixabay...
오규원 “봄날과 돌”
봄날과 돌 오규원 어제 밤하늘에 가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온 돌들이 늦은 아침잠에 단단하게 들어 있네 봄날 하고도 발끝마다 따스한 햇볕 묻어나는 아침 Image : Pixabay 따스한 봄 볕이 발등을 간지럽히는 나른한 봄날 아침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시다. 어제저녁 밤하늘에서 별이 되어 신나게 놀다 돌아왔다는 발상은 마치...
도종환 “인연”
인연 도종환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 풀씨 하나로 만나 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 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가없이 그렇게 흐르다 옛적 만나던 자리에 돌아오니 가을 햇볕 속에 고요히 파인 발자국 누군가 꽃 들고...
정유찬 “살아있는 날엔”
살아있는 날엔 정유찬, 「행복한 여운」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환상이고 슬퍼도 울 수 없으면 고통이며 만남이 없는 그리움은 외로움일 뿐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아쉬운 아픔이 되고 행동이 없는 생각은 허무한 망상이 된다. 숨 쉬지 않는 사람을 어찌 살았다 하며 불지 않는 바람을 어찌 바람이라 하겠는가 사람이 숨을 쉬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살아있는 날엔...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이별이 슬픔에게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말하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헤어짐은 절망이 아니다 차오르는 슬픔아 차라리 날선 시선으로 울컥울컥 심장을 찔러다오 무력한 자존심이 바닥까지 비워지면 흐뭇하게 가슴을 내어주마 속절없는 상처야 단단히 아물어라 다가올 그리움 아프지 않게 Image : Pixabay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 밀려오는 슬픔을 차마...
정일근 “새벽과 아침사이”
새벽과 아침사이 정일근 귀신으로 잠들었다 사람으로 눈을 뜨는 시간 어둠과 빛 사이 잠깐 저 푸른 시간, 젓대와 바람 사이에 놓인 갈대청 같은, 하늘이 펼쳐주는 셀로판 한 장 같은, 시간이 잠시 멈추며 숨을 쉬는 횡경막 같은, 내가 하루 중 제일 먼저 그 사람을 생각하는 그 때. Image : Pixabay 「새벽과 아침사이」은 귀신의 시간인 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