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지울 수 없는 얼굴”

2026년 04월 15일

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Image source: Pixabay

시 「지울 수 없는 얼굴」은 누군가를 향한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을 끊임없이 썼다 지우는 과정을 통해, 결국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지울 수 없는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시인은 차갑고 냉정하다가도 때로는 불 같고 따뜻하며, 영혼의 요람 같은 그 사람의 모습을 수많은 수식어로 표현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 어떤 말로도 그 사람을 완벽하게 정의하거나 마음에서 떼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니야"를 반복하며 부정하던 마음 끝에 찾아오는 것은, 지워보려 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깊은 사랑과 존재감에 대한 묵직한 인정이다. 이 시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겪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편린들을 보여주면서도, 그 모든 감정이 결국 하나의 깊은 사랑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잔잔한 공감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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