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원 “가을비”

2025년 10월 11일

빗방울이 떨어지고
처마가 기운다

가을에 피는 봉선화는 서럽다
꽃주머니속 씨알들이
이참에 한번 터져버릴 참이다

빨갛게 꽃물 든 가을 낮잠
흰 고무신 닦아 세워둔 나들이가
기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 이정원 ‘가을비’

이번 가을에는 비가 참 많이 온다. 어제,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이 시는 짧은 행 안에 잔잔하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시다. 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느껴지는 고요함과 약간의 쓸쓸함이 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나는 이렇게 짧은 행으로 된 시에 더 끌린다.

단순한 문장의 첫 구절부터 가을비의 촉촉한 이미지로 마음을 적신다. 오래된 집의 처마가 기운 모습은 부드러운 빗소리와 함께 원래보다 더 기울어진 느낌. 정겨우면서도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가을에 피는 봉선화는 서럽다”는 표현에는, 계절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꽃의 외로움이 담겨 있다. 여름이 아닌 가을에 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봉선화는 조금 늦은 듯하고 늦게나마 터지려고 하는 모습이 오히려 가을비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느낌이다.

 ‘흰 고무신’을 신고 맑은 가을 하늘을 꿈꾸며 나들이를 하려고 했지만, 처마 밑에 놓고 멈춘 시간같은 가을비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 비 그치기를 기다리다 어린 시절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듯 빗소리에 물들어 낮잠에 빠졌다. 평화롭고 따스한 분위기.

이 시는 특별한 사건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비 오는 가을날의 정적 속에서 느껴지는 그리움과 따뜻한 고요함을 담담히 그려낸다.
읽고 나면 마음이 조금 젖는 듯하면서도, 이상하게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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