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슈테판 츠바이크

 책정보
    • 연민-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은이),이온화 (옮긴이)
    • 출판사: 지식의숲(넥서스)
    • 발행일: 2007-12-10
    • 원제 : Ungeduld des Herzens (1939년)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연민』 (원제: Ungeduld des Herzens, 초조한 마음, 1939)은 인간의 선의가 얼마나 쉽게 비극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 심리소설이다. 츠바이크 특유의 내면 분석과 도덕적 딜레마가 교차하는 작품으로, 감정의 불안정성과 ‘연민’이라는 감정의 양면성을 정교하게 해부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안톤 호프밀러(Anton Hofmiller)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의 젊은 장교로, 주둔지 지역의 귀족인 케케스팔바(Kekesfalva)의 딸 에디트(Edith)을 저택 파이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디트는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다. 안톤은 처음에는 자신의 실수와 동정심에서 그녀를 위로하지만, 그 감정은 점차 복잡한 연민으로 변하며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내적 혼란에 빠진다.

츠바이크는 ‘연민’과 ‘사랑’의 경계를 극도로 모호하게 만든다. 안톤이 에디트를 돌보는 행위는 처음에는 인간적인 선의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자기만족과 죄책감, 그리고 사회적 체면을 위한 위선으로 변해간다. 결국 안톤은 에디트의 사랑 고백 앞에서 진정한 감정이 아닌 도덕적 의무감으로 반응하고, 그 위선이 비극적 결말을 불러온다.

작품의 제목인 Ungeduld des Herzens은 직역하면 ‘마음의 초조함’이다. 츠바이크는 인간이 타인의 고통 앞에서 느끼는 불안, 죄책감, 그리고 그 불안을 덮기 위해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 믿는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연민이란 감정이 반드시 선하지 않다는 사실, 그것이 오히려 타인을 파괴할 수도 있다.

츠바이크의 문장은 한 인간의 심리를 거미줄처럼 세밀하게 엮어내서, 선의와 위선, 동정과 욕망의 경계를 끊임없이 흔든다. 인물의 대사 하나, 시선 하나에도 도덕적 갈등이 배어 있으며, 독자는 마치 심리 실험의 관찰자처럼 등장인물의 내면을 따라가게 된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남자의 잘못된 선택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타인의 고통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츠바이크는 독자에게 도덕적 확신 대신 불편한 진실을 던진다. 연민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속이는 가장 위험한 감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연민』은 20세기 초 유럽의 몰락과 인간 정신의 불안을 배경으로, ‘선의의 한계’를 탐색한 걸작이다. 츠바이크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마음속 가장 미묘하고 위험한 감정—타인을 위해 울지만 결국 자신을 위해 우는 감정—을 잔혹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이 책을 읽으며,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쉽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 마음이 진정한 배려인지 내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타인의 상처를 감싸려다 오히려 더 깊이 아프게 할 때도 있다. 연민은 따뜻함이지만 동시에 자기기만일 수도 있다. 상처 입은 사람 곁에 선다는 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그 불편한 진실을 함께 감당하는 용기라는 걸 느꼈다. 의사 콘도르가 호프밀러 소위에게 ‘연민은 두 종료기 있는데, 하나는 약하고 감상적인 연민, 또 하나는 창조적인 연민’을 이야기한다. 자기 방어적인 감상적 연민은 서로를 파괴할 수 있지만 진정한 창의적 연민은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며 행동하는 것이라 했다.

공감했던 문장들

5 어떤 조직에 맞서는 개인의 저항은 조직에 순응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개인적 용기는 모든 것이 조직화되고 기계화된 우리 시대엔 이미 소멸되고 없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번 전쟁 때 군중의 용기라는 것이 기껏 일렬종대 내에서의 용기임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사람은 아주 희귀한 요소들을 발견할 겁니다. 수많은 허영심과 경솔함, 심지어 지루함과 두려움까지도… 그래요.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조소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동감 넘치는 다른 무리들과 반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전투에서 가장 용감하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을 심히 의심스러운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위 글은 노년의 안톤 호프밀러가 자신을 전쟁 영웅으로 떠받드는 것에 대한 속마음을 내비치는 고백이다. 이 고백은 진짜 용기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는 영웅이라 불리지만, 두려움과 허영 속에서 흔들린 인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히려 더 진실하고,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54 이런 이상한 망설임이 나를 덮친 바로 그 순간, 나도 이런 고행이 어리석고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다른 사람이 즐기지 못한다고 해서 나의 즐거움을 포기하거나 다른 사람이 불행하다고 해서 나의 행복을 피하는 것은 아무 의미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위 글은 호프밀러가 자신에게 갑자기 떨어진 행운을 즐겨도 되는지, 다른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데 나만 행복해도 되는지에 대한 갈등 후에 자신을 합리화하는 과정의 독백이다. 행복 앞에서도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의 마음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결국 삶은 타인의 불행과 비교할 수 없는 개인의 몫임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61 난생 처음으로 나 같은 젊은 사람이 이 지상의 누군가를 도왔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저 평범하고 자신감없는 하급 장교인 내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힘을 지녔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발견으로 흥분해 있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어려서부터 ‘나는 전혀 쓸모없는 인간이며 아무도 나에게 관심없는, 그래서 있으나마나한 인간’이라고 믿어 왔다는것, 그리고 이 생각만큼 나의 영혼을 무겁게 짓눌렀던 것은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한다.

케케스팔바 귀족의 모든 가족들로 부터 도움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받고 감격해하는 호프밀러의 심정이다. 생전 처음 타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깨달음은 호프밀러에게 처음으로 삶의 의미를 준다. 그 순간의 기쁨은 순수하지만, 동시에 연민과 책임의 덫으로 향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123 우리는 마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콘도르가 갑자기 내게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소위님, 들어보세요. 반만 행한 일과 반만 내뱉은 암시는 언제나 악의 원인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은 어중간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콘도르의 말은 인간의 책임과 결단에 대한 경고다. 선의든 사랑이든, 끝까지 책임지지 않은 채 중간에 멈춘 행동은 결국 상처와 혼란을 낳는다. 호프밀러가 에디트에게 보인 어정쩡한 태도, 즉 연민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이 비극의 씨앗이 되었듯, 삶에서 진정한 악은 악의 의도보다도 ‘어중간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일깨운다.

177 이것은 마치 시인이 아직 자기가 표현하지 않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보려고 노력하는 대신 이미 한번 표현된 것을 다시 한 번 써먹으려고 하는 것과 같고, 철학자가 아직 인식하지 못했거나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알아내려고 하지 않고 이미 오래 전에 인식된 개념을 백번도 더 인용하는 것과 같아요. 치유할 수 없다. 이것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의학에서 치유할 수 없는 케이스란 단지 순간적인, 즉 우리의 시대적이고 학문적인 공간 내에서의, 다시 말해 우리의 제한되고 편협한 좁은 지식 내에서의 인식입니다.

콘도르는 의학을 고정된 진리가 아닌 끊임없이 발전하는 기술로 본다. 시인과 철학자가 새로운 것을 찾아 나아가야 하듯, 의학 또한 ‘불치’라는 한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새로운 치료법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자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의학의 발전으로 많은 불치병들을 치료하고 있는 것을 보면 1930대에 글을 쓴 츠바이크의 통찰은 놀랍기도 하다.

223~224 연민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으로, 남의 불행을 보고 느낀 괴로운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려는 조급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남의 고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려는 본능적 욕망일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연민이기도 합니다만 –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이 연민은 인내하며 참으면서 자기의 힘이 한계에 부딪칠 때까지, 아니 그 이상까지 견디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자기의 임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비참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갈 수 있을 때에만 지치지 않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까지 희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문장은 이 소설의 핵심 정리 내용이다. 츠바이크는 인간의 선의가 ‘연민’이라는 포장으로 얼마나 쉽게 자기방어로 변질되는지를 통찰하며, 진정한 연민은 감정의 동요가 아니라 책임과 인내의 실천임을 강조한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서 있는 용기, 그것이 인간다움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일깨운다.

332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하지도 희생적이지도 않습니다. 내겐 이제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더 이상은 나를 경배하는 것도, 추앙하는 것도 견딜 수가 없고, 마치 내가 원하거나 좋아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이 고백은 호프밀러가 스스로의 한계와 위선을 직면하는 순간이다. 그는 에디트를 향한 연민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과 부담의 굴레였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은 또 자신의 연약함으로 위장하는 다른 자기보호 본능이다. 이 장면은 인간의 연민이 얼마나 불완전하며, 타인을 위한 희생조차 결국 자신을 구하려는 본능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346 그러나 사랑을 고백한 여자와 그 남자 사이에는 불같이 뜨겁고 비밀스런 위험한 공기가 흘렀다. 여자는 사랑하는 이가 진정으로 행복한지 알아내는 무시무시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가장 은밀한 본성에 따라 항상 무한한 것을 원하기 때문에 적당한 것이나 절제된 것을 다 역겹게 여길 수밖에 없고, 참을 수도 없다. 사랑은 상대방의 주저함이나 어색함에서 저항을 느끼고, ‘자기를 완전히 내주기를 꺼려하는 것’을 보면 당연히 저항감을 숨겼다는 것을 안다. 당시의 내 태도에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무언가가 있었고, 내 말에는 뭔가 솔직하지 못하고 세련되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의 빈틈없는 기대에는 못 미쳤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확신시키는 최후의 사명에 실패했다. 그녀의 의심은 접점 더 깊어졌다. 그녀가 바라는 본질적이고 유일한 것, 즉 그녀의 사랑에 대한 무언가를 내가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갔다.

이 장면은 호프밀러의 연민이 더 이상 사랑의 가면으로 숨겨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에디트의 진심 앞에서 호프밀러는 자신의 감정이 위로와 의무, 그리고 자기기만의 혼합물임을 깨닫는다. 그녀의 통찰은 그의 거짓된 연민을 간파하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에 이른다. 이 순간은 ‘선의의 한계’가 폭로되는 결정적 장면으로, 사랑 없는 연민이 결국 얼마나 잔혹한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364 내가 그랬듯, 그도 이제 나를 스스럼없이 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거나 숨겨야 하는 사람은 열리고 자유로운 시선을 잃어버린다.

이 문장은 진실을 숨긴 인간 관계의 단절을 상징한다. 호프밀러는 솔직하지 못한 위선이 결국 자신을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열린 마음과 자유로움을 빼앗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숨김은 죄책감을 낳고, 죄책감은 시선을 흐리게 만든다. 결국 그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과도 눈을 마주칠 수 없게 된다. 츠바이크는 이 한 문장으로, 거짓된 연민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413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개인이 진실로 원하는 쪽보다는, 속한 집단이나 주변이 원하는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상당히 높다. 우리가 하는 생각의 상당 부분은 오래 전에 받은 인상과 영향들에 의해 자동적으로 계속 작동하는 것이고, 특히 어려서부터 훈련과 규율을 통해 군인으로 성장한 사람은 거역할 수 없는 억압과도 같은 명령이라는 정신병의 노예가 된다. 모든 군사명령은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힘이자, 의지를 해체해버리는 힘이다.

호프밀러는 에디트의 고통 앞에서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를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에디트에서 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선언한다. 이는 개인의 선택을 집단의 규범에 전가하는 비겁한 자기합리화이자, 체제의 폭력에 길들여진 인간의 초상이다. 츠바이크는 이 장면을 통해 도덕적 결단 대신 조직에 복종하는 것을 택한 인간의 나약함을 비판한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존재의 핵심이 도전받고 위협당하거나 침해당하는 도덕적 고통을 겪으면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조직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다는 것으로 도피한다. 츠바이크는 이러한 도피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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