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잎사귀 속으로 노오랗게 가을이 밀려와 우리집 마당은 옆구리가 환합니다
그 환함 속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 나가는 이 가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한 장의 음악입니다
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들이 다 음악입니다
나는 지금 느티나무 잎사귀가 되어 고독처럼 알뜰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귀뜨라미의 울음소리를
사다리 삼아서 저 밤하늘에 있는 초저녁 별들을 발명했습니까
그대를 꿈꾸어도 그대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이 여러 곡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저녁입니다
음악이 있어 그대는 행복합니까 세상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도 음악이 되는 저녁,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누워서 그대를 발명합니다
– 박정대 “그대의 발명”
이 시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서정적인 정경을 ‘발명’이라는 낯선 단어로 표현했다. 공감하기가 어렵다. 흔히 가을은 ‘아름답게 물드는 계절’, ‘사물이 익어가는 시간’으로 표현한다. 이 시는 그것을 ‘발명한다’고 말한다. 아!~ 발명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던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행위이면서, 이미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감각의 전환 – 이것은 발견 아닌가? – 일 것도 같다.
시에서 질문한다. “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이 반복되는 물음은 단순한 철학적 의문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결국 ‘내 마음에서 시작된 창조물’임을 알려주는 것 같다. 고독도, 저녁도, 별빛도 자연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이 만들어낸 정서적 발명품이랄까? 세상을 느끼는 우리의 방식이 곧 발명이란 것인다. 재미있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발명’은 과학적이거나 기술적인 개념이 아니라 감정의 창조를 의미한다. ‘가을을 발명한다’는 말은, 같은 나무와 같은 하늘 아래서도 저마다 다르게 세상을 느끼는 인간의 마음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발명’은 낯설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다.
이 시는 가을의 풍경을 직접적으로 노래하기보다, 감각이 세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과정, 즉 ‘느낌의 발명’을 노래한다. 이 시가 처음에는 공감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발명’이라는 단어가 자연의 흐름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인공적이기 때문이라서 그런 것 같다.
가을은 단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이 시의 가장 큰 느낌이다. 생소하지만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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