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눈 내리는 날”

눈 내리는 날

눈 내리는 겨울 아침 가슴에도 희게 피는 설레임의 눈꽃, 오래 머물지 못해도 아름다운 눈처럼 오늘을 살고 싶네, 차갑게 부드럽게 스러지는 아픔 또한 노래하려네, 이제껏 내가 받은 은총의 분량만큼 소리없이 소리없이 쏟아지는 눈 눈처럼 사랑하려네, 신(神)의 눈부신 설원에서 나는 하얀 기쁨 뒤집어쓴 하얀 눈사람이네.
– 이해인 –

이해인 수녀님의 「눈 내리는 날」.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의 풍경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시인의 맑고 투명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름다운 시다.

창밖으로 소리 없이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아침, 이 시를 읽으니 내 마음속에도 시인처럼 하얀 눈꽃이 피어나는 것만 같다. 차가운 계절이지만 시인의 언어는 참 따뜻하고 부드럽게 다가온다.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가슴 속에 ‘설레임의 눈꽃’이 핀다는 표현이 참 좋다. 마치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 창밖을 내다보는 아이의 마음이 된 듯한 기분도 든다.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하얗게 덮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지만, 곧 녹아 사라지는 존재다. 시인은 그렇게 ‘오래 머물지 못해도 아름다운 눈’처럼 ‘오늘’을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영원하지 않기에 더 소중하고 애틋한 이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채워가려는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하다. 또한 눈이 차갑게, 때론 부드럽게 녹아 스러지는 것을 삶의 ‘아픔’에 비유하면서도, 그것조차 회피하지 않고 ‘노래하려네’라고 말하는 태도에서 삶을 대하는 성숙하고 담담한 자세를 배운다. 아픔마저도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시인은 자신이 받은 ‘은총의 분량만큼’ 소리 없이 쏟아지는 눈처럼 사랑하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게, 그저 묵묵히 세상을 덮어주는 저 눈처럼 깊고 넓은 사랑을 꿈꾸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세상이라는 ‘신(神)의 눈부신 설원’ 위에 서서 ‘하얀 기쁨’을 온몸에 뒤집어쓴 눈사람이 된 시인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다. 그 순백의 기쁨이 나에게까지 전해져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이 시는 추운 겨울날, 언 손과 마음을 녹여주는 따뜻한 차 한 잔처럼 깊은 위로와 평온함을 선물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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