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명언의 핵심은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영역과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을 구분하는 지혜에 있다.
이 문장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인도(India)의 지혜인 화살 경전(Sallatha Sutta)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석가모니(Shakyamuni)는 이를 ‘두 개의 화살’이라는 비유로 설명했다.
삶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첫 번째 화살을 쏜다. 갑작스러운 사고, 육체적 질병,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혹은 기대했던 일의 실패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감각을 가진 존재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생리적이고 물리적인 자극인 통증(Pain)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우리는 그 상처를 붙잡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라며 끊임없이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불안해한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향해 쏘는 두 번째 화살, 즉 괴로움(Suffering)이다. 첫 번째 화살은 피부를 상하게 하지만, 두 번째 화살은 영혼을 파괴한다. 통증은 감각의 영역이지만, 괴로움은 그 통증에 저항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갑자기 비가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Pain), 그 비에 젖어 온종일 짜증을 내며 분위기를 망치거나 스스로를 비난할지 아니면 비를 피할 처마를 찾아 낄낄대며 웃을지는 우리의 몫(Suffering is optional)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외적 요인과 통제할 수 있는 내적 요인을 구분하는 데,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은 개인의 통제 밖에 있지만, 사고 방식과 행동, 그리고 반응은 개인이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는 그의 저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며, 달리다 보면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아픔’은 피할 수 없는 물리적 사실이지만 “더 이상 못 가겠다”라거나 “나는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라며 비관하는 ‘고통’은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아픔을 담담하게 수용함으로써, ‘아픔’을 ‘고통’으로 치환하지 않는 삶의 기술을 가르쳐준다.
결국 이 말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통제할 수는 없어도, 그 사건에 부여하는 의미와 태도는 온전히 우리 자신의 권한임을 일깨워준다.
* 한글판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Pain을 ‘아픔’으로, Suffering을 ‘고통’으로 번역했다. 아마도 영어 번역이 아니라 일본어 번역에서 오는 뉘앙스의 차이라고 짐작된다. 우리나라 말에서 ‘고통(苦痛)은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표준한국어사전)을 의미하기 때문에 Pain에도 Suffering에도 해당된다. 영어에서 pain은 주로 몸의 통증·불편·자극처럼 “감각” 쪽에 가까워서 달릴 때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차는 그 물리적 사실을 의미하고, suffering은 같은 통증이 있더라도 거기에 의미·해석·저항·자기비난이 붙어서 생기는 “심리적 아픔/괴로움”에 가깝다. 따라서 원문의 의도를 가장 또렷하게 살리려면, “통증은 피할 수 없으나, 괴로움은 선택이다.”라는 번역이 pain=통증(몸), suffering=괴로움(마음)으로 분리돼서 의미 전달이 좋다.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