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 서명 :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 존재의 연결을 묻는 카를로 로벨리의 질문들
  • 지은이 : 카를로 로벨리 (지은이),김정훈 (옮긴이)
  • 출판사 : 쌤앤파커스
  • 발행일 : 2025-06-02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의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책이였다.

이 책에서는 과학과 철학, 예술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는 고전 『장자』의 ‘물고기의 즐거움’ 일화를 통해 “관계의 세계”로 처음과 마지막을 생각하도록 이끈다. 그 중간 과정에서는 미술, 음악, 철학, 과학을 통해 질문을 확장한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고정된 실체로 인식하는 우리의 관성을 부드럽게 흔든다. 그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관측자가 없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양자물리학의 말처럼 존재는 관측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는 통찰로 이어진다.

관측자와의 관계는 우리의 이웃 뿐 아니라 우리와 자연, 국가와 국가, 심지어 미술, 음악과 같은 예술 등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시각은 ‘우리는 모두 세계의 일부이고, 그 연결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라는 말로 존재의 상호 연결성을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이 말은 존재의 본질이 고립된 ‘나’가 아니라 세상과 맺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정해진 경계를 넘어설 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지구 중심의 우주관을 뒤엎기 위해 상식에 맞선 케플러와 갈릴레오 등과 같이 정해진 경계를 넘어설 때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리를 과학과 예술의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

인도 출신의 영국 현대 조각가인 애니시 커푸어(Anish Kapoor, 1954~ )를 위한 글에서는 “어떤 사물이 더 크게 공명하거나, 우리의 손을 잡고 기존의 범주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그 공명과 질문은 우리와 사물 사이의 연결 고리를 확장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저는 이것이 최고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섬세하게 제안하는 것이죠.(039)”라며 위대한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공명과 질문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연결해준다고 이야기 한다.

038-039 형태와 질감은 우리 뇌가 해석하고 연결한 것입니다. 공명하는 것이죠.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공명합니다. 의자를 보면 우리는 그것이 의자라는 것을 알고,의자는 우리가 아는 그 기능과 공명하고, 우리가 경험한 다른 의자들과 연결된 수많은 기억과 공명합니다. 그냥 사물이기만 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해석된 대상만 있을 뿐입니다. 그 대상은 만화경 같은 상호작용 네트워크에 의해 구성됩니다. 주변 환경과 우리 자신, 그리고 뇌에서 일어나는 엄청나게 복잡한 일이 연결되어 대상을 해석한 결과를 내놓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사물은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의자, 책상, 자동차 등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 기능과 용도를 알 수 있고, 우리 뇌에 ‘익숙한 사물’로 저장되죠. 이미 정보가 처리된 사물들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지나칩니다. 그러다 어떤 사물이 더 크게 공명하거나, 우리의 손을 잡고 기존의 범주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그 공명과 질문은 우리와 사물 사이의 연결 고리를 확장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저는 이것이 최고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섬세하게 제안하는 것이죠. 과학은 이 일을 다른 수단을 통해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책은 확실성에 기대기보다 질문을 던질 때 사고가 틀을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질 때 기존 세계의 오류를 벗어날 수 있다.  특히 그가 친구이자 출판인인 로베르트 칼라소에 대한 추모의 글에서도 답이 없는 질문으로 가득한 특별한 사람이 새로운 생각의 공간을 열 줄 안다고 하였다.

146 당신이 그리울 거예요, 로베르토 (칼라소), 세상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용기 있게 시류를 거스르고, 지성과 호기심으로 충만하고, 답이 없는 질문으로 가득한 사람이요. 새로운 생각의 공간을 열 줄 알고, 생각이 자라고 퍼져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현실을 조직할 줄 아는 사람이요. 고마워요, 로베르토. 당신은 저와 많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켰어요.

저자는 과학적 호기심을 삶의 태도로 확장한다. 그는 믿는 것만을 믿지 않고, 이전에 없던 발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이는 과학에만 필요한 태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과학적 태도가 일상, 사회, 미래에까지 적용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 필요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벨리는 정치 참여에도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실 정치와 국제 관계, 전쟁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서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고, 너 자신만 생각하라’는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는 편협한 근시안이 되라는 이야기라고 주장하며(024),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모험을 시작하라고 한다. 그래서 “말할 줄 아는 사람은 말하고,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은 연주하고,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은 발표하고, 글 쓸 줄 아는 사람은 글 쓰고, 조직할 줄 하는 사람은 조직하고, 더 많이 할 줄 아는 사람은 더 많이 하는 것”, 즉 행동하라고 요구한다.

 059 배제가 아니라 포용의 관점에서 국제정치를 재고하고, 지금 같은 영구적 분쟁이 아닌 협력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음악에 관한 에릭 바타글리아와의 대담에서는 음악조차도 ‘소리들 사이의 내적관계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청취자, 그의 뇌, 뉴런, 기억, 기대, 세계, 문화와의 외적 관계가 중요하다.(047)’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공명’하는 강도와 의미, 감정의 세계 전체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해석을 한다.

 049 카를로 로벨리 : 자연은 조합들의 변화무쌍한 놀이입니다. 우리의 뇌는 이 무수한 조합 속에서 구조와 패턴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생명체는 자신과 상호작용하는 혼란스러운 사건들 속에서 패턴을 찾고, 이를 이용해 방향을 잡고 미래를 예측하며 살아갑니다.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두 가지 핵심적 일을 합니다. 과거의 흔적을 (기억 속에) 축적하고, 이를 이용해 끊임없이 미래를 예상하는 것입니다. 각 음은 앞서 나온 음의 기억을 바탕으로 의미를 얻고, 다음에 나올 음에 대한 기대를 생성합니다. 이 기대는 청취자의 이전 경험들을 기반으로 합니다. 음악은 이러한 기대들을 충족하고 배반하는 무한 게임이며, 이 모든 것은 순수한 감정입니다. 인생과 마찬가지죠.

그는 음악과 원자와의 공통점을 통해 고유한 사물의 속성은 고립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부분에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에 따라, 즉 관측자와의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고 말한다. 즉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051 카를로 로벨리 : 그게 사실이라면, 음악가의 눈이 오선지를 보는 것만으로 이 모든 것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해도 놀랍지 않습니다(유치원 아이가 첫 단어를 읽듯 오선지를 읽는 저에게는 그렇지 않겠지만요). 같은 미 샤프가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멋진 음악 작품에서 0.5초의 침묵은 우리를 숨죽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듣는 침묵이 다른 곳에서 그저 지루하기만 한 침묵과 똑같은 것이라고 해도요. 사물은 고립되어 고유의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사물은 관계의 구조입니다. 원자들도 마찬가지죠. 원자들도 나름대로 음악과 같습니다.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부분에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에 따라 결정됩니다. 음악의 관계성은 음악에서만 나타나는 이상한 특유의 성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부분에 소개된 인터뷰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종교적 관점과 과학적 관점의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로 인한 고통, 고통을 줄이려고 하는 노력에 대해 철저한 무신론자인 로벨리는 고통을 위로 받기 위해 신을 찾기보다는 우리 뇌속 뉴런 1,000억개가 만들어내는 내면의 세계로 위로를 찾으라고 한다. 결국 고통은 외부의 어떤 이유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발적으로 만든 의미 중 하나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피하고 줄이려는 부정적 대상이라고 규정한다.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세계관에 관계없이 인간의 고통을 덜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84~285 그러나 고통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자연은 우리를 지금과 똑같이 진화시켜 부상과 부정적 상황을 피하는 동일한 행동 반응을 하도록 만들면서도, 고통을 안 느끼도록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이는 ‘신은 우리를 고통스럽지 않게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다만 자연은 우리에게 특별히 친절할 이유가 없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이 특별히 가혹할 이유도 없지만요. 제 생각에 답은 미묘합니다. 고통은 행동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우리가 무언가를 피하도록 유도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에 붙이는 이름일 뿐입니다. 즉, 뇌에서 우리 자신을 표상하는 부분에 도달하는 신호에 붙이는 이름입니다. 의식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고통이 경험의 개별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기쁨 이전에 고통의 자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이유로 고통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느낌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이라고 부르는 신호를 감지하고 평가하는 뇌의 부분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행동을 결정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통은 마치 자유의 대가인 셈입니다. 덧붙이자면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분명히 고통을 느낍니다. 이는 역시 자유롭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따라서 고통의 문제는 인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나’라는 존재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는 깨달음에 사로잡혔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이들 안에서 존재한다.’ 라는  말은 관계를 통해 나 자신이 형성된다는 진실을 압축한다. 내가 관측의 대상이며, 관측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존재한다는 양자론적 의미가 연결된다. 이 책은 과학, 철학, 삶이 어우러진 사유의 장이다.

로벨리는 우리가 질문할 때 사고가 깨어난다고 말한다. 그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통해 우리가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게 돕는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지적 체험을 넘어 감각을 흔드는 경험이었다. ‘나’가 홀로 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를 관측하는 존재이며, 연결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로벨리는 과학자이지만, 이 책을 통해 나는 그를 철학자이자 시인처럼 느꼈다. 정해진 틀을 넘어 존재와 세계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했다. 이 감각은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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