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를 닫으며, 평소 시간에 대한 인식이 습관적이고 당연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이론물리학자이지만 이 책속의 말은 깊은 철학과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적인 감동이 있다. 내가 마주치는 평범한 순간 순간에 대한 소중함에 울컥한 마음과 함께 이렇게 오래 여운이 남았던 과학 에세이가 있었던가 싶다.
그리고 순수한 아름다움, 순수한 절망, 순수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 <장엄미사곡>을 찾아 듣고 또 들었다. 놀랍게도 그 음악의 댓글에는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 The Order of Time 을 타고 들어와 이 음악을 듣게 되었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216
내게 삶, 이 짧은 삶은 감정들의 끊임없는 외침에 불과하다. 이 외침은 우리를 이끌어 하느님의 이름 안에, 정치적 신념에, 우리를 안심시키는 의식 안에 가두어 결국 정리된 상태로 아주아주 거대한 사랑 안에 머물게 한다. 결론적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외침인 것이다. 이 외침은 때로는 고통이 되고 때로는 노래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 노래는 시간에 대한 인지이다. 이 노래는 시간이고, 그 자체가 시간의 시작인 베다의 찬가이다. 베토벤의 <장엄미사곡 Missa Solemnis>중 ‘베네틱투스 Benedictus’에서 바이올린 곡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순수한 절망, 순수한 행복을 표현한다. 그 곡 속에서 숨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멈춰 있으면, 신비로운 감각의 원천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의 원천도 바로 이것이다.
잠시 후 곡이 잦아들면서 멈출 것이다. “은줄이 끊어지고 황금 전등이 깨지고, 암포라 항아리의 밑바닥이 부서지고 도르래가 연못에 빠지고 먼지가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두 눈을 감고 휴식은 취할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참 달콤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이것이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먼저 읽은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를 통해 알게 된 책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어려운 현대 물리학의 개념을 우리 일상의 것들을 갖고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의 개념 중에서 ‘유일성’은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026), 시간이 과거-현재-미래로 흐른다는 ‘방향성’은 볼츠만의 방정식에 의해 그 의미를 잃었고(045) 부분적으로만 ‘순서가 있을 뿐이다’라고 한다. 아울러 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공통적인 ‘현재’란 없으며(061), 우리와 가까이 있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 하나의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인 이 세상에서의 ‘독립성’은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에 의해 부정되었다(087).
그렇다면 시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단지 세상(우주)의 작은 일부인 인간의 관점에서 기간의 흐름 속에 있는 세상을 본다(201). 이 흐름은 엔트로피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물리학에서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아는 유일한 방정식이며, 시간의 흐름에 대해 설명하는 방정식도 이것뿐이다(036).
ΔS≥0
이 엔트로피가 낮은 때가 과거이고 높아진 때가 미래. 따라서 엔트로피에 의해 과거와 미래가 차이가 있다.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과정에서 흔적이 남고 그 흔적으로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구분할 수 있다.
174
풍부한 옛 흔적의 존재는 과거가 결정되어 있다는 친숙한 느낌을 준다. 어떤 비슷한 미래의 흔적도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열려 있다는 느낌을 준다. 흔적의 존재는 우리의 뇌가 지나간 사건들의 지도를 광범위하게 펼쳐 놓을 수 있게 해주지만, 미래의 사건에 대한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느낌의 바탕을 이룬다. 과거에 대해서는 뭔가를 할 수 없을지라도, 다양한 미래에 대해서는 선택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로벨리는 존재의 본질을 시간이라는 틀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은 ‘사물’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기초 물리학에 의해 ‘사물’에 대한 시간적 개념은 부정되었고 ‘사건’에 대한 것만 남아있다. 따라서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고 소멸하는 과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을 포함해서 우리가 ‘사물’이라 부르는 것들도 사실은 시간 위에 쌓인 흔적이자, ‘사건’이며 순간의 응결일 뿐이다.
111
‘사물’ 자체도 잠깐 동안 변함이 없는 사건일 뿐이다.
112
‘시간’이 그저 사건을 뜻하는 것뿐이라면, 모든 사물은 시간이다. 시간 속에 있는 것만 존재한다.
105 ~106
세상은 ‘사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질로, ‘실체’로, ‘현재에 있는’ 무엇인가로 이루어졌다고 말이다. 혹은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연적 발생으로, 과정으로, ‘발생하는’ 그 무엇인가로 이루어진 세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 무엇은 지속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영속적이지 않다. 기초 물리학에서 시간 개념의 파괴는 두 가지 관점 중 첫 번째 관점이 붕괴된 것이지 두 번째는 아니다. 변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의 안정성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일시성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게 된 것이다.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은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 것이다. ‘사물’의 전형은 돌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 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단위는 공간의 특별한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뿐 아니라 ‘언제’에도 있다. 그것이 바로 사건인데, 그들은 공간은 물론 시간적인 한계가 있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저장하는 기능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토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을 재구성하며 그 위에서 다음을 상상한다. 이 과정이 바로 ‘시간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과거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미래는 ‘예측’이라는 형태로 열린다.
이 두 흐름이 맞물리면서 우리는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는 감각을 갖게 된다.
로벨리는 물리학자의 시선으로 이 과정을 해석한다. 우리 존재는 물리적 실체로서 주변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흔적을 남긴다. 이러한 흔적이 곧 기억의 기초가 된다. 이 상호작용이 없다면 우리는 시간의 감각을 지니지 못한다. 다시 말해, 시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흐름이라기보다, 기억과 예측이 가능한 존재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하~어렵다.
184
우리의 자아를 세우는 세 번째 요소는 기억이다.
186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은 생존의 기회를 늘리는데, 진화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뇌 구조를 선택해왔다. 우리가 바로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이 선택이 우리 정신 구조의 핵심이다. 이 선택이 우리에게는 시간의 ‘흐름’인 것이다.
195~196
이 공간, 즉 앞날을 예측하려는 우리의 연속적인 과정과 결합된 기억이 시간을 시간으로, 우리를 우리로 느끼게 하는 원천이다. 우리가 내적 성찰을 통해 공간이나 물질이 없는 곳에서 존재하는 일은 상상할 수 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속한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특별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을 하고 흔적을 남기며, 물리적 실체인 우리가 기억과 예측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예측은 사소하지만 귀중한 시간에 대한 관점을 갖게 해준다. 시간은 우리를 세상의 일부와 접하게 해준다. 그러니까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저자의 주장은, 인간과 세계를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흐름과 상호작용의 산물로 본다. 우리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시간 위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의 엮임이며, 공간 속에서 한정된 위치를 점할 뿐이다. 따라서 존재는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자기 정체성을 하나의 고정된 ‘나’로 보지 말고, 시간과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흐름’으로 이해하라는 제안이기도 하다. 사회적 관계, 기억, 환경은 모두 우리를 형성하는 사건들이며, 우리는 그것들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짜여진다.
180
우리는 과정이자, 사건들이며, 구성물이고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제한적이다.
역시 가장 인상깊은 내용은 거의 결론에 가깝다. 즉, 우리 ‘자신’이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관계적이고 구성적인 자아라는 관점이다. 개인은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과 진화적 필요 속에서 만들어진 거울 구조라고 한다. 이런 관점이라면, 나를 인식하는 경험조차도 세계와 타인을 통해 매개된다는 점에서, 주체는 스스로 존재한다기보다 끊임없이 생성되고 재구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다”라는 말은 근본적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진화적 과정이 만들어낸 반영된 이미지에 가깝다. 그래서 내 자신의 정체성은 가족과 친구들로 구성된 사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183~184
스스로를 주체라고 생각한 경험은 일차적인 경험이 아니다. 수많은 생각들에 기초한 복합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나의 일차적인 경험은(이 경험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나 자신이 아닌, 내 주위의 세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나 자신’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는 것은, 어느 순간 우리 자신에게 어떤 부가적 특성을 지닌 인간임을 투영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인데, 그 특성이란 진화를 통해 우리가 속한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도록 수천 년 동안 발달해온 능력이다.우리는 우리와 닮은 존재들이 우리 자신에 대해 가졌던 생각의 반영이다.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인상깊었던 ‘고통’에 대한 부분은 이 책에서도 무척 인상깊은 대목이였다.
존경했던 이론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그의 부재에 대한 안타까움을 부재의 고통으로 표현하였고, 그 원인이 애정과 사랑이라고 한 문장에는 공감이 많이 되었다.
128
이제 그는 지금 이곳에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우리의 시간이다. 기억과 추억,부재의 고통, 그것이다.
그렇다고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 부재는 아니다. 고통은 애정과 사랑에서 시작된다. 애정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부재의 고통도 없을 것이다. 결국 부재의 고통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성장하는 것이므로 선하고 아름답다.
또한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형식이며, 우리의 정체성의 원천(195)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고통의 원천이라고 하였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고통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196
그리고 (시간은) 우리의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부처는 수백만 명의 인간들이 그들 삶의 근간으로 여겼던 것들을 몇 가지 격언으로 요약했다. 출생이 고통이고 노화가 고통이고 질병이 고통이고 죽음이 고통이고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고통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과의 단절이 고통이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갖게 되고 그것에 집착했다가 결국은 잃게 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어떤 것을 시작했다가 결국은 끝나기 때문에 고통이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에 혹은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예측 속에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 한다.
시간은 고통이다.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으며 솔직히 여러 부분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시간에 대한 여러 고정 관념들이 물리학에 의해 부정되고,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시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허무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문장을 따라가면 잠시 이해한 듯 하다가도 금세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희미해지고 흩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호함과 허무함 속에서 겸손해지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물과의 상호작용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다시 한번 깊은 깨달음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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