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그 여름의 끝”

2025년 08월 25일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백일홍, 붉은 꽃이 백일을 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 그 이름을 빨리 해서 나온 이름, 배롱나무라고도 한다.

이 시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안동 병산서원 마당을 가득 메우고 백일 동안 꽃을 매달고 있는 백일홍나무가 인상 깊게 떠올랐다. 이 시 속에서 그 백일홍은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고 버티는 힘의 상징처럼 생각된다.

시인은 “절망”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만, 그 절망을 꽃으로 비유해 표현한 점이 재미있다. 절망이라는 건 보통 어둡고 무거운 색으로 그려지는데, 여기서는 붉은 꽃으로 나타내서 역설적으로 강렬하고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바꿔 놓은 것 같고, 오랫동안 끈질기게 떨어지는 않은 것에 대한 어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마지막 부분에서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마음에 남았어. 절망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순간, 꽃잎처럼 흩날리며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을 전해줬기 때문이다. 폭풍과 절망 속에서도 끝내 버티는 힘,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의 섭리로 결국 떨어지고 마는 백일홍처럼 절망도 사라지고 만다.

전체적으로는 간결한 언어와 반복되는 장면 덕분에 읽기 어렵지 않았고, 쉽게 이미지와 감정을 따라갈 수 있다. 읽고 나면 묘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드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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