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하 “덩굴식물”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가다 보면,
온통
꼬인 삶뿐이다

덩굴식물이여, 
나를 감고 올라가거라
오르다 지치면
내 마디에 앉아
숨을 고르고
더 오를 곳이 없으면
내 가지 타고 다른 나무로 가거라

그래서 너의 생애가 풀어지지 않는 삶의
비어로 마감하더라도
더 오를 길이 없다고
다시 내려오지 말거라 

이산하 “덩굴식물”

이 시에서는 삶을 휘감는 덩굴로 인간의 생애를 말하지만, 지나치게 따뜻하지 않은 느낌이다. 오히려 차가운 체념 속에서 묘한 단호함이라고나 할까. 다른 나무를 감고 오르다 꼬여버리는 삶, 풀리지 않는 비어(空語)로 마감할지라도 다시 내려오지 말라는 말에는 위로보다 냉정한 선언이 있다.

덩굴에게 내 몸을 내주고, 마디를 쉼터로 허락하는 장면은 관대해 보이지만 동시에 무심하다. “내 가지 타고 다른 나무로 가라”는 말은 집착 없는 이별 같고, 더 이상 내게 머무르지 말라는 쿨한 거리 두기처럼 들린다. 시인은 애써 감싸거나 구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 바엔 그냥 올라가라, 끝까지 가라” 하고 말한다.

이 태도는 현실을 달콤하게 미화하지 않는다. 꼬여버린 삶은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려오지 말고, 그대로 끝까지 올라가라. 이것은 무심한 듯한 충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솔직한 격려일 수 있다.

이 느낌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시지프 신화』와도 닮아 있다.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그는 바위를 내려놓지 않고 끝까지 밀어 올린다. 덩굴 역시 길이 없다 해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허무라 할지라도, 내려오는 대신 올라가는 것. 시의 쿨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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