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 이언 매큐언, ‘속죄’ 중 p67 –
이 문장은 영국의 소설가인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대표작인 ‘속죄(Atonement, 한정아옮김, 문학동네)’의 67쪽에 나온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한 소녀의 오해와 상상력이 한 남자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그리고 그로 인한 평생에 걸친 참회를 서정적이면서도 날카로운 필치로 그려냈다. 이 문장은 ‘속죄’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며, 결론이다.
세상의 불행이 누군가의 악의적인 계획에서만 시작된다고 믿는 것은 어쩌면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우리를 가장 깊은 슬픔으로 몰아넣는 것은 우리가 가진 혼동의 생각, 그 생각에서 비롯된 오해, 그리고 타인의 내면을 나와 같은 무게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지함이다. 타인을 단순한 배경이나 도구가 아닌, 나와 똑같이 아파하고 꿈꾸는 독립된 우주로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이 문장은 소설의 내용처럼 타인의 타자성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결여된 상태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이 통찰은 문학의 장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2026년 1월 미네소타에서 연방 이민 단속 작전 과정에서 시민이 사망한 사건들이 연이어 보도되었고, 그때마다 비극은 ‘사실을 다루는 방식’에서 한 번 더 증폭됐다. 예컨대 1월 초 미니애폴리스에서 르네 니콜 굿(Renee Nicole Good)이 ICE 요원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을 두고, 트럼프는 SNS에서 고인을 “전문 선동가”로 규정하며 정당방위를 시사했고, 이후 로이터 인터뷰에서는 “양쪽 모두에게 슬픈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단속 기조 자체는 옹호했다. 또 1월 24일에는 미니애폴리스에서 알렉스 프레티(Alex Pretti)가 연방 요원 총격으로 숨진 사건이 보도됐는데, 트럼프 진영의 ‘무장한 위협’ 서사와 달리 현장 영상은 그 주장과 어긋난 정황을 담고 있다는 보도도 함께 나왔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단숨에 판결하는 태도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속죄』가 집요하게 묻는 지점-혼동과 오해가 어떻게 한 인간의 운명을 ‘이야기’로 단순화해버리는가-가, 이런 현실의 사건들에서도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타인을 ‘사람’으로 보기보다 ‘진영의 증거’로, ‘정책의 정당화 자료’로 취급하는 순간, 우리는 그의 내면과 삶의 맥락을 삭제한다. 그 삭제는 물리적 폭력만큼이나 잔인한 방식으로 남는다. 비극 이후조차 “선동가”, “위협”, “양쪽 모두” 같은 언어가 너무 빨리 도착할 때, 그 언어는 애도보다 먼저 세계를 정리해버리고, 이해보다 먼저 결론을 내려버린다.
물론 우리는 타인의 실존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는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내면을 100%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없다. ‘이해’라는 명목하에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자신의 잣대로 규정짓는 행위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잘 안다.
진정한 이해란 내가 그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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