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날 눈 내리는 겨울 아침 가슴에도 희게 피는 설레임의 눈꽃, 오래 머물지 못해도 아름다운 눈처럼 오늘을 살고 싶네, 차갑게 부드럽게 스러지는 아픔 또한 노래하려네, 이제껏 내가 받은 은총의 분량만큼 소리없이 소리없이 쏟아지는 눈 눈처럼 사랑하려네, 신(神)의 눈부신 설원에서 나는 하얀 기쁨 뒤집어쓴 하얀 눈사람이네. – 이해인…
시 모음
안도현 “겨울 편지”
겨울 편지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숲) 중. 흰 눈을 듬뿍 뒤집어쓴 채 추위 속에서 몸을 떨고 있는 매화나무의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 시인은 그 가녀린 떨림을…
조지훈 “사모”
사모(思慕) 그대와 마주 앉으면 기인 밤도 짧고나 희미한 등불 아래 턱을 고이고 단 둘이서 나누는 말 없는 얘기 나의 안에서 다시 나를 안아주는 거룩한 광망 그대 모습은 운명보담 아름답고 크고 맑아라 물 들인 나무 잎새 달빛에 젖어 비인 뜰에 귀똘이와 함께 자는데 푸른 창가에 귀 기울이고 생각하는 사람 있어 밤은 차고나. – 조지훈…
김재진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별에서 소리가 난다. 산 냄새 나는 숲 속에서 또는 마음 젖는 물가에서 까만 밤을 맞이할 때 하늘에 별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자작나무의 하얀 키가 하늘 향해 자라는 밤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겨울은 더 깊어 호수가 얼고 한숨짓는 소리, 가만히 누군가 달래는 소리, 쩌엉쩡 호수가 갈라지는 소리,…
김광섭 “마음”
마음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채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 김광섭, 〈마음〉 김광섭 시인의 〈마음〉은 인간의 내면을…
진은영 “청혼”
청혼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박이도 “꿈꾸는 겨울”
꿈꾸는 겨울 박이도 겨울은 침묵한다 땅속에 씨앗을 묻어두고 깊은 잠에 빠진다 풍경으로 날리는 눈발의 무게만큼 바람을 놓아준다 아, 겨울은 심심할까 얼어붙은 시간 저녁을 나는 기러기떼 아무도 말벗이 없다 눈발이 녹아 땅 속의 씨앗 소중한 생명이 솟아날 때까지는 겨울은 꿈꾸고 있다 박이도 시인의 〈꿈꾸는 겨울〉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니, 차가운 바람 속에…
전석홍 “행복 찾기”
행복 찾기 – 전석홍 – 미처 몰랐었네 그것이 행복인 줄을 하루치 땀방울 흠뻑 쏟아내고 둥지 들어 도란도란 어둠을 사를 때 지금 발 디딘 여기 이 자리 하찮은 일상에서 흐뭇함을 느낄 때 이 순간이 행복인 것을 뜬구름 잡으려 헤매는 무리들 오늘도 빈 하늘만 찾아 떠도네 가진 것 크든 작든 자리 높든 낮든 아무 상관없는 일 행복은…
정현종 “방문객”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 것이다 ㅡ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마음,내 마음이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복효근 “무심코”
무심코 명이나물 한 잎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데 끝이 붙어 있어 또 한 잎 따라온다 아내의 젓가락이 다가와 떼어준다 저도 무심코 그리했겠지 싸운 적도 잊고 나도 무심코 훈훈해져서 밥 먹고 영화나 한 편 볼까 말할 뻔했다. – 복효근, 『꽃 아닌 것 없다』(천년의시작, 2017) 中 재미와 미소와 감동이 있는 시. 사소한 다툼 끝에 마주 앉은…
박노해 “등 뒤를 돌아보자”
등 뒤를 돌아보자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앞만 보고 달려온 동안 등 뒤의 슬픔에 등 뒤의 사랑에 무심했던 시간들을 돌아보자 눈 내리는 12월의 겨울나무는 벌거벗은 힘으로 깊은 숨을 쉬며 숨 가쁘게 달려온 해와 달의 시간을 고개 숙여 묵묵히 돌아보고 있다… 그립고 눈물 나고 사랑하는 것들은 다 등 뒤에 서성이고 있으니 그것들이 내 등을 밀어주며 등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