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김재진 어느 날 네가 메마른 들꽃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면 소리 없이 구르는 개울 되어 네 곁에 흐르리라. 저물 녘 들판에 혼자 서서 네가 말 없이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면 작지만 꺼지지 않는 모닥불 되어 네 곁에 타오르리라.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네가 누군가를 위해 울고 있다면 손수건 되어 네 눈물 닦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과...
시 모음
백원기 “깊어가는 겨울”
깊어가는 겨울 점점 더해가는 추위 소한 지나 대한으로 가고 하얀 눈이 오다 바람에 어니 미끄러운 빙판길 서둘러 서산에 해지고 겨울 달은 싸느란데 성에꽃 들창 너머로 보일 듯 말듯한 손짓 옛 기억에 그리움이 싹터 추억 열매를 매만진다 찬바람이 심술궂게 전깃줄을 건드리면 주고받던 사랑의 밀어 들리는 듯 어디서 무얼 하는지 만났다 헤어진 사람 밤공기가 차가워...
이정하 “눈 오는 날”
눈 오는 날 눈 오는 날엔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끼리 만난다. 그래서 눈 오는 날엔 사람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눈 오는 날엔 그래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 이정하,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중 - Image from Pixabay 눈이 내리면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하고, 그 포근한...
최유진 “살다가 살다가”
살다가 살다가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기거든 누구를 탓하지 말거라 이미 생긴 일이거늘 어찌 하겠느냐 살다가 울 일이 생기거든 누구를 원망 말고 실컷 울어보아라 울고 나면 속이라도 시원하지 않겠는가 살다가 이별할 일이 생기거든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인연은 만났다가 헤어지기도 하는 것 살다가 사랑할 일이 생기거든 밀고 당기는 시간을 줄이거라 사랑의 실타래가...
김지하 “겨울에”
겨울에 마음 산란하여 문을 여니 흰눈 가득한데 푸른 대가 겨울 견디네 사나운 짐승도 상처받으면 굴속에 내내 웅크리는 법 아아 아직 한참 멀었다 마음만 열고 문은 닫아라. - 김지하 - 김지하 시인의 「겨울에」는 마음의 소란스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밖을 내다본 이의 시선을 따라가며 삶의 깊은 지혜를 건네준다. 시의 첫머리에서 시인은 산란한 마음을 안고...
이해인 “눈 내리는 날”
눈 내리는 날 눈 내리는 겨울 아침 가슴에도 희게 피는 설레임의 눈꽃, 오래 머물지 못해도 아름다운 눈처럼 오늘을 살고 싶네, 차갑게 부드럽게 스러지는 아픔 또한 노래하려네, 이제껏 내가 받은 은총의 분량만큼 소리없이 소리없이 쏟아지는 눈 눈처럼 사랑하려네, 신(神)의 눈부신 설원에서 나는 하얀 기쁨 뒤집어쓴 하얀 눈사람이네. - 이해인 - 이해인...
안도현 “겨울 편지”
겨울 편지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숲) 중. 흰 눈을 듬뿍 뒤집어쓴 채 추위 속에서 몸을 떨고 있는 매화나무의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 시인은 그 가녀린 떨림을 단순히 추위에 떠는...
조지훈 “사모”
사모(思慕) 그대와 마주 앉으면 기인 밤도 짧고나 희미한 등불 아래 턱을 고이고 단 둘이서 나누는 말 없는 얘기 나의 안에서 다시 나를 안아주는 거룩한 광망 그대 모습은 운명보담 아름답고 크고 맑아라 물 들인 나무 잎새 달빛에 젖어 비인 뜰에 귀똘이와 함께 자는데 푸른 창가에 귀 기울이고 생각하는 사람 있어 밤은 차고나. - 조지훈 - 밤의 고요함 속에...
김재진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별에서 소리가 난다. 산 냄새 나는 숲 속에서 또는 마음 젖는 물가에서 까만 밤을 맞이할 때 하늘에 별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자작나무의 하얀 키가 하늘 향해 자라는 밤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겨울은 더 깊어 호수가 얼고 한숨짓는 소리, 가만히 누군가 달래는 소리, 쩌엉쩡 호수가 갈라지는 소리,...
김광섭 “마음”
마음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채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 김광섭, 〈마음〉 김광섭 시인의 〈마음〉은 인간의 내면을...
진은영 “청혼”
청혼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