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등 뒤를 돌아보자”

2025년 12월 04일

등 뒤를 돌아보자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앞만 보고 달려온 동안
등 뒤의 슬픔에 등 뒤의 사랑에
무심했던 시간들을 돌아보자

눈 내리는 12월의 겨울나무는
벌거벗은 힘으로 깊은 숨을 쉬며
숨 가쁘게 달려온 해와 달의 시간을
고개 숙여 묵묵히 돌아보고 있다…

그립고 눈물 나고 사랑하는 것들은
다 등 뒤에 서성이고 있으니

그것들이 내 등을 밀어주며
등불 같은 첫 마음으로
다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니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 박노해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12월, 박노해 시인의 이 시를 읽으니 바쁘게 뛰던 심장이 잠시 숨을 고르는 기분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쫓아 앞만 보고 달려가기 바쁘다. 성과나 목표, 즐기고 먹고 놀 것들 같은 것에 매달려 정작 내 등 뒤에 무엇이 남겨졌는지,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잊고 살 때가 참 많다. 시인은 그런 우리에게 잠시 멈춰서 등 뒤를 돌아보자고 부드럽게 제안한다.

벌거벗은 채로도 깊은 숨을 쉬는 겨울나무의 이미지가 참 인상 깊게 다가온다. 화려한 잎을 다 떨구고도 묵묵히 지나온 시간을 견디며 서 있는 나무처럼, 우리도 숨 가빴던 지난 일 년을 조용히 안아주어야 할 것 같다. 시를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되는 건, 우리가 소홀히 했던 슬픔이나 사랑, 그리고 눈물 나게 그리운 것들이 결코 사라져 버린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내 등 뒤에서 서성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은 등 뒤에 있는 그 과거의 기억들이 단순히 지나간 흔적이 아니라, 나를 다시 나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대목이다. 마치 누군가 따뜻한 손길로 지친 내 등을 가만히 밀어주는 느낌이 든다. 처음 품었던 그 순수한 마음, '첫 마음'을 다시 불 지피게 하는 연료가 바로 우리가 지나온 시간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 시를 통해 12월은 단순히 한 해의 끝이 아니라, 등 뒤의 사랑을 힘입어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따뜻한 쉼표 같은 시간이라는 위로를 받는다.

올해 내 등 뒤에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나도 가만히 뒤돌아본다.

관련 글

최옥 “너의 의미”

너의 의미 최옥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가는 바람에게도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때는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너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더 보기...

고정희 “지울 수 없는 얼굴”

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더 보기...

서덕준 “아침의 단막극”

아침의 단막극 서덕준 동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흔들리는 들풀과 어귀의 꽃잎들이 모두 네게로 불어오면 좋겠다 아침 안개는 너의 가는 길에 은빛 카펫이 되고 새의 지저귐은 너를 깨우는 자그마한 연주가 되면 좋겠다 달이 잠시 무대의 뒤로 사라지고 화려한 단막극이 시작되듯 쏟아지는...

더 보기...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