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 “저녁눈”

2025년 11월 29일

눈 내리는 시골 풍경

저녁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박용래

박용래 시인의 '저녁눈'을 읽으니 마음 한구석이 처연해지면서도 동시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기분이다. 시에 등장하는 '말집', '호롱불', '조랑말', '여물' 같은 시어들은 마치 오래된 흑백 영화나 빛 바랜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금은 쉽게 마주하기 힘든 옛 시절의 시골 풍경이 그려져 짙은 향수를 자극하고, 그 시절의 소박한 정취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시에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각 연을 마무리하는 '붐비다'라는 단어의 쓰임새다. 보통 '붐비다'라고 하면 사람들로 북적이고 소란스러운 시장통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소리 없이 내리는 하얀 눈발이 호롱불 밑과 조랑말의 발굽 아래, 그리고 여물 써는 소리 곁에 가득 모여드는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역설적이게도 눈송이가 붐비면 붐빌수록 세상은 더욱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그 고요함 속에서 눈 내리는 풍경은 더욱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결국 눈이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은 화려한 도심이 아니라 '변두리 빈터'라는 점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쓸쓸하고 소외된 공간을 눈발만이 찾아와 가득 채워주고 위로해주는 것 같다. 눈 내리는 저녁의 적막과 그 속에 담긴 따스한 시선이 어우러져, 읽는 내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평온해진다.

관련 글

유치환 “목숨”

목숨 유치환 하나 모래알에 삼천세계가 잠기어 있고 반짝이는 한 성망에 천년의 흥망이 감추였거늘 이 광대무변한 우주 가운데 오직 비길 수 없이 작은 나의 목숨이여 비길 수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아아, 표표한 이 즐거움이여 Image : Pixabay 최근에 읽은 '프로젝트...

더 보기...

이정록 “이웃”

이웃 이정록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 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 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 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 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더 보기...

최옥 “너의 의미”

너의 의미 최옥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가는 바람에게도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때는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너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더 보기...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