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눈 내리는 날”

2026년 01월 08일

눈 내리는 날

눈 내리는 겨울 아침 가슴에도 희게 피는 설레임의 눈꽃, 오래 머물지 못해도 아름다운 눈처럼 오늘을 살고 싶네, 차갑게 부드럽게 스러지는 아픔 또한 노래하려네, 이제껏 내가 받은 은총의 분량만큼 소리없이 소리없이 쏟아지는 눈 눈처럼 사랑하려네, 신(神)의 눈부신 설원에서 나는 하얀 기쁨 뒤집어쓴 하얀 눈사람이네.
- 이해인 -

이해인 수녀님의 「눈 내리는 날」.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의 풍경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시인의 맑고 투명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름다운 시다.

창밖으로 소리 없이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아침, 이 시를 읽으니 내 마음속에도 시인처럼 하얀 눈꽃이 피어나는 것만 같다. 차가운 계절이지만 시인의 언어는 참 따뜻하고 부드럽게 다가온다.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가슴 속에 '설레임의 눈꽃'이 핀다는 표현이 참 좋다. 마치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 창밖을 내다보는 아이의 마음이 된 듯한 기분도 든다.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하얗게 덮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지만, 곧 녹아 사라지는 존재다. 시인은 그렇게 '오래 머물지 못해도 아름다운 눈'처럼 '오늘'을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영원하지 않기에 더 소중하고 애틋한 이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채워가려는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하다. 또한 눈이 차갑게, 때론 부드럽게 녹아 스러지는 것을 삶의 '아픔'에 비유하면서도, 그것조차 회피하지 않고 '노래하려네'라고 말하는 태도에서 삶을 대하는 성숙하고 담담한 자세를 배운다. 아픔마저도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시인은 자신이 받은 '은총의 분량만큼' 소리 없이 쏟아지는 눈처럼 사랑하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게, 그저 묵묵히 세상을 덮어주는 저 눈처럼 깊고 넓은 사랑을 꿈꾸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세상이라는 '신(神)의 눈부신 설원' 위에 서서 '하얀 기쁨'을 온몸에 뒤집어쓴 눈사람이 된 시인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다. 그 순백의 기쁨이 나에게까지 전해져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이 시는 추운 겨울날, 언 손과 마음을 녹여주는 따뜻한 차 한 잔처럼 깊은 위로와 평온함을 선물해 준다.

관련 글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이별이 슬픔에게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말하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헤어짐은 절망이 아니다 차오르는 슬픔아 차라리 날선 시선으로 울컥울컥 심장을 찔러다오 무력한 자존심이 바닥까지 비워지면 흐뭇하게 가슴을 내어주마 속절없는 상처야 단단히 아물어라 다가올 그리움 아프지 않게 Image...

더 보기...

정일근 “새벽과 아침사이”

새벽과 아침사이 정일근 귀신으로 잠들었다 사람으로 눈을 뜨는 시간 어둠과 빛 사이 잠깐 저 푸른 시간, 젓대와 바람 사이에 놓인 갈대청 같은, 하늘이 펼쳐주는 셀로판 한 장 같은, 시간이 잠시 멈추며 숨을 쉬는 횡경막 같은, 내가 하루 중 제일 먼저 그 사람을 생각하는 그 때....

더 보기...

박노해 “이 무서운 사랑”

이 무서운 사랑 박노해 봄날 오후, 카페테라스에서 마치 사랑을 시작한 듯한 남녀가 스마트폰도 들여다보지 않고 서로의 눈과 입술과 목선을 어루만지듯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다 3초 10초 15초 바로 그 순간, 이 15초 동안,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두 남녀는 15초간 흘러갔고...

더 보기...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