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이 무서운 사랑”

2026년 03월 10일

A romantic and cozy bedroom scene with soft lighting symbolizing passion and the passage of time

이 무서운 사랑

박노해


봄날 오후, 카페테라스에서 마치 사랑을 시작한 듯한 남녀가 스마트폰도 들여다보지 않고 서로의 눈과 입술과 목선을 어루만지듯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다 3초 10초 15초 바로 그 순간, 이 15초 동안,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두 남녀는 15초간 흘러갔고 타올랐고 갈라졌고 변해갔고 늙어갔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삶은 시간 속에 놓여 있고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것 존재한다는 건 붕괴의 과정이 아닌가 사랑이라는 건 퇴색의 과정이 아닌가 인생이라는 건 소멸의 과정이 아닌가 아 이 얼마나 무서운 생의 순간인가 이 얼마나 무서운 사랑이고 삶인가 그러니 붕괴와 소멸의 한가운데서 저 빛나는 절정의 15초, 또 15초, 다시 15초 우리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수밖에
Image : Pixabay

박노해 시인의 ‘이 무서운 사랑’은 찰나의 순간을 반복을 통해 영원으로 바꾸는 사랑의 마법과, 그 이면에 숨겨진 시간의 유한함을 포착한 시다.
오늘처럼 나른한 봄날 오후, 스마트폰조차 잊은 채 서로에게 몰입한 연인들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15초’라는 시간 동안에도 그들이 늙어가고, 소멸해 가며,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아직 차가운 봄바람같은 진실을 일깨운다.

처음에는 왜 사랑이 ‘무섭다’고 표현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시를 읽어 내려갈수록, 우리가 누리는 이 빛나는 순간들이 사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붕괴’와 ‘퇴색’의 과정 중 일부라는 사실에 가슴도 서늘해진다. 1초, 1초 흐르는 시간은 곧 우리 생의 깎임이며,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순간조차 우리는 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음...어차피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이라면, 붕괴와 소멸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위대한 일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뿐인 것 같다. 15초라는 너무나 짧은 운명적 시간 속에서 터트리는 절정의 환희, 그 환희의 반복,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 시간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는 생각이 든다. 무서우리만큼 짧은 우리의 생이기에, 지금 내 눈앞의 당신을 바라보는 이 15초가 그토록 찬란하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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