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목숨”

2026년 07월 22일

목숨

유치환


하나 모래알에 삼천세계가 잠기어 있고 반짝이는 한 성망에 천년의 흥망이 감추였거늘 이 광대무변한 우주 가운데 오직 비길 수 없이 작은 나의 목숨이여 비길 수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아아, 표표한 이 즐거움이여
Image : Pixabay

최근에 읽은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거대한 우주와 까마득한 시간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한없이 작고, 알고 있는 영역은 극히 일부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작은 모래알 하나에 삼천세계(三千世界: 불교적 세계관에서 나온 말로, 온 우주 전체이자 무한히 광대하고 넓은 세상)가 담겨 있고, 반짝이는 별빛(星望: 반짝이는 별빛의 기운이나 별이 내뿜는 빛 줄기를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까마득한 세월 동안 밤하늘을 밝혀온 아득한 천체의 시간을 상징) 하나에 천년의 역사가 숨어 있다는 구절을 읽다 보면 문득 내가 얼마나 조그마한 먼지 같은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보통은 내가 이렇게 작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괜히 허무해지거나 쓸쓸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그 반대의 유쾌한 정서를 선물한다. 비길 데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역설적으로 그 어떤 거대한 짐이나 세상의 중압감도 짊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넓디넓은 우주에 비하면 지금 내 안의 고뇌와 걱정도 결국 한 조각 먼지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온다. 거창한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 가볍고 자유롭게 피어나는 표표한 즐거움('표표(飄飄)하다'는 바람에 나부끼듯 홀가분하고 세속의 상념이나 짐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한 모양을 뜻. 따라서 '표표한 즐거움'은 거대한 세상의 무게와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을 때 느끼는 자유롭고 한가로운 기쁨을 뜻)을 깨닫게 해주는 참 다정하고도 멋진 시다.

관련 글

이정록 “이웃”

이웃 이정록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 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 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 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 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더 보기...

최옥 “너의 의미”

너의 의미 최옥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가는 바람에게도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때는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너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더 보기...

고정희 “지울 수 없는 얼굴”

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더 보기...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