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형식을 빌린 독재
Wenn die Diktatur eine Tatsache ist,
ist die Revolution eine Pflicht.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이 문장은 파스칼 메르시어(Pascal Mercier)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Nachtzug nach Lissabon)』에 알렉산드리 오라시우 드 알메이다 프라두(Alexandre Horácio de Almeida Prado)의 묘비에 적힌 문장으로 나온다. 이 책의 독일어 초판은 카를 한저 출판사(Carl Hanser Verlag)에서 2004년에 출간되었고 한국어판은 전은경이 옮겼으며, 2007년 들녘과 2022년 비채에서 출판하였다.
‘하나의 현실’과 ‘하나의 의무’라는 표현은 원문의 대칭 구조를 살리면서 독재가 추상적인 위험이 아니라 이미 눈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이 문장을 실제 인물인 프라두 판사의 발언은 아니다. 알렉산드리와 그의 아들 아마데우 이나시우 드 알메이다 프라두(Amadeu Inácio de Almeida Prado)는 모두 소설 속 인물이다. 따라서 정확한 출처 표기는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속에서 알렉산드리 프라두의 묘비명으로 제시된 문장”이 된다.
알렉산드리는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의 독재 아래에서 판사로 일한다. 법을 지키고 집행해야 하는 판사이지만, 그가 섬기는 국가는 법을 정의의 기준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는 장치로 바꾸어 놓았다. 아들 아마데우는 아버지가 독재 정권의 법정에 봉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냉정한 협력자라기보다 법과 양심 사이에서 무너져 가는 인물이다. 그는 겉으로는 체제의 법을 집행하지만, 내면에서는 그 체제가 법의 정신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침묵을 복종으로 받아들이지만, 나중에 드러나는 아버지의 죽음과 묘비명은 그 침묵 안에 감춰져 있던 고통을 보여준다.
이 문장의 핵심 단어는 ‘현실’과 ‘의무’다. 독재가 하나의 주장이나 가능성에 머문다면 사람은 판단을 유보할 수 있다. 그러나 물리적 억압과 검열, 자의적인 법의 왜곡, 각종 권력을 통한 법의 일방적 제정이 이미 일상의 현실이 되었다면 중립은 더 이상 중립으로 남지 않는다. 침묵은 현상 유지를 돕고, 복종은 권력이 계속 작동하도록 만든다. 이때 혁명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부당한 질서를 끝내기 위한 도덕적 책임이 된다.
여기서 혁명은 반드시 피를 통한 무장투쟁만을 뜻하지 않는다. 불의한 판결을 거부하는 일, 검열된 사실을 기록하는 일, 고문당한 사람을 숨겨 주는 일,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일도 기존 질서를 흔드는 혁명적 행동이 될 수 있다. 판사에게 가장 근본적인 혁명은 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법을 권력으로부터 되찾는 일이다. 알렉산드리의 비극은 그 진실을 알면서도 생전에 행동으로 충분히 옮기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묘비명은 신념의 선언인 동시에 너무 늦게 도착한 자기 고백이 된다.
이 문장은 법과 정의가 언제나 같지 않다는 사실도 드러낸다. 우리 과거를 통해 많이 겪어봤고 겪고 있듯이 법은 공동체를 보호하지만, 독재자는 법의 형식을 빌려 폭력을 합법처럼 꾸밀 수 있다. 이때 법을 따르는 행위가 오히려 정의를 배반할 수 있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가 정당한 법에는 복종할 책임이 있지만 부당한 법에는 불복종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틴 루서 킹 연구소의 기록은 불복종이 은밀한 회피가 아니라 공개적이고 비폭력적인 저항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함께 제시한다.
그러나 “혁명은 의무다”라는 단정에도 위험은 있다. 누가 독재를 판단하고 어떤 행동을 혁명이라고 부를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정치적 불만을 독재라고 규정하면 폭력과 파괴도 쉽게 정당화될 수 있다. 기존 독재를 무너뜨린 세력이 새로운 독재자가 된 역사도 이미 너무 많아서 혁명 세력에 대한 경계도 소흘히 해서는 안된다. 혁명이 정의를 내세운다는 사실만으로 그 수단과 결과까지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에서 반항이 억압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인간의 생명과 존엄이라는 한계를 잃으면 다시 폭정으로 바뀔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 말하는 의무는 무조건적인 폭력의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을 의무, 불의한 명령을 거부할 의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생명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정의를 회복할 의무에 가깝다.
프라두의 묘비명은 영웅적인 혁명가의 구호라기보다 행동하지 못한 지식인의 양심에 더 가까운 문장이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 알았지만 자신의 직위와 가족, 두려움과 책임 사이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그래서 이 문장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침묵을 반성한다. 불의를 안다는 것과 불의에 맞선다는 것 사이에는 깊은 간격이 있다. 알렉산드리의 묘비명은 바로 그 간격에 대한 고민이다.
이 문장의 배경이 되는 포르투갈의 독재를 끝낸 카네이션 혁명(Revolução dos Cravos)이 있다. 48년에 걸친 독재를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시민들에 의해 끝낸 과정을 되돌아 보게 한다. 결국 시민이 군인들의 총구에 붉은 카네이션을 꽂은 장면은 혁명이 반드시 증오와 살육의 언어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AP 통신 2024년 4월 25일 「Portugal marks the 50th anniversary of the Carnation Revolution」 기사)
또한 로이터(Reuters)가 2021년 2월 5일 보도한 「“We don’t want this military coup”: Myanmar teachers join protests」기사는, 미얀마의 교사와 대학 강사들이 군부의 명령에 협조하지 않고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한 사례를 다룬다. 일상을 유지하는 노동을 멈추는 행위가 독재에 맞서는 현실적인 혁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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