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유치환 “목숨”

목숨 유치환 하나 모래알에 삼천세계가 잠기어 있고 반짝이는 한 성망에 천년의 흥망이 감추였거늘 이 광대무변한 우주 가운데 오직 비길 수 없이 작은 나의 목숨이여 비길 수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아아, 표표한 이 즐거움이여 Image : Pixabay 최근에 읽은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거대한 우주와 까마득한 시간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한없이 작고, 알고 있는 영역은 극히 일부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작은 모래알 하나에 삼천세계(三千世界: 불교적 세계관에서 나온 말로,...

이정원 “가을비”

가을비 이정원 빗방울이 떨어지고 처마가 기운다 가을에 피는 봉선화는 서럽다 꽃주머니속 씨알들이 이참에 한번 터져버릴 참이다 빨갛게 꽃물 든 가을 낮잠 흰 고무신 닦아 세워둔 나들이가 기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Source: Pixabay 이번 가을에는 비가 참 많이 온다. 어제,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이 시는 짧은 행 안에 잔잔하고 서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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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잊는 일”

잊는 일 손택수 꽃 피는 것도 잊는 일 꽃 지는 일도 잊는 일 나무 둥치에 파넣었으나 기억에도 없는 이름아 잊고 잊어 잇는 일 아슴아슴 있는 일 아슴아슴(부사) ①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은 모양. ② 기억이나 생각 따위가 또렷하지 않고 흐릿하게 떠오르는 모양. Image from Pixabay 이 시는 잊는다는 행위가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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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순 “나비가 앉았던 자리”

나비가 앉았던 자리 한옥순 이것도 사랑이라고 꽃이 피는구나 이것도 이별이라고 꽃이 지는구나 이것도 인연이라고 흔적이 남는구나 잠시 머무른 자리가 참 고요하구나. Image from Pixabay 이 짧은 시는 사랑의 생애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사랑은 꽃이 피는 순간처럼 시작된다. 설렘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그 향기는 잠시 세상을 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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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하  “이슬 처럼”

이슬 처럼 황선하 길가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살고 싶다 수없이 밟히우는 자의 멍든 아픔 때문에 밤을 지새우고도, 아침 햇살에 천진스레 반짝거리는 이슬처럼 살고 싶다. 한숨과 노여움은 스치는 바람으로 다독거리고, 용서하며 사랑하며 감사하며, 욕심 없이 한 세상 살다가 죽음도 크나큰 은혜로 받아들여, 흔적 없이 증발하는 이슬처럼 가고 싶다.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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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강 “붓을 들어 별을 그린다”

붓을 들어 별을 그린다 윤정강 어둔 밤 부엉이 울음이 빛을 떠난 산 그림자 보다 더 외로운 것은, 잠 못 드는 밤에 제일 맑고 빛나는 별 하나 안고 피던 꽃잎 때문일까. 바람이 잠든 물 위에 별 하나 담구고, 밤마다 내려오는 하늘은 곁 눈짓으로 속삭임 감추며 붓을 들어 별을 그린다. Image from Pixabay 시 속에서 별은 밤마다 다시 떠오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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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말하지 않은 말”

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 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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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9월”

9월 이외수 가을이 오면 그대 기다리는 일상을 접어야겠네 간이역 투명한 햇살 속에서 잘디잔 이파리마다 황금빛 몸살을 앓는 탱자나무 울타리 기다림은 사랑보다 더 깊은 아픔으로 밀려드나니 그대 이름 지우고 종일토록 내 마음 눈시린 하늘 저 멀리 가벼운 새털구름 한 자락으로나 걸어 두겠네 Image from Pixabay 이 시를 읽으면, 9월의 청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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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하산(下山)”

하산(下山) 신경림 언젠가부터 나는 산을 오르며 얻은 온갖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기 시작했다 평생에 걸려 모은 모든 것들을 머리와 몸에서 훌훌 털어버리기 시작했다 쌓은 것은 헐고 판 것은 메웠다 산을 다 내려와 몸도 마음도 텅 비는 날 그날이 어쩌랴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된들 사람살이 겉과 속을 속속들이 알게 될 그 날이 Image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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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덩굴식물”

덩굴식물 이산하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가다 보면, 온통 꼬인 삶뿐이다 덩굴식물이여, 나를 감고 올라가거라 오르다 지치면 내 마디에 앉아 숨을 고르고 더 오를 곳이 없으면 내 가지 타고 다른 나무로 가거라 그래서 너의 생애가 풀어지지 않는 삶의 비어로 마감하더라도 더 오를 길이 없다고 다시 내려오지 말거라 Image from Pixabay 이 시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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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옥 “조율”

조율 안미옥 이 줄은 누구의 것일까 유리문을 열면 흰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의 처음이 늘 하얗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참혹처럼 ‘무너지게 될 거야’ 누군가 할 말을 ‘무뎌지게 될 거야’ 라고 들었다 뭉치가 죽었어 화장 비용이 없어서 아직 방에 같이 있어 멈추려는 숨 때문에 개의 코는 마지막까지 길어졌을 텐데 그런 개를 따뜻한 방 한가운데 놓아두고 저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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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옥 “욕심”

욕심 한경옥 서두르지 마라 일찍 핀 꽃은 다른 꽃이 피기도 전에 진다. 불꽃은 활활 타오를수록 더 빨리 사그라진다. 올라간 만큼 박살나는 능금을 보라. 가을 들판에 고만고만하게 키를 맞춘 벼들은 태풍 앞에서도 의연하다. 너무 앞서 나가지 마라. Image from Pixabay 이러 저러한 일로 오늘도 마음이 조급하다. 그러다가 이 시를 읽으니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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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구월의 기도”

구월의 기도 이해인 저 찬란한 태양 마음의 문을 열어 온 몸으로 빛을 느끼게 하소서 우울한 마음 어두운 마음 모두 지워버리고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9월의 길을 나서게 하소서 꽃 길을 거닐고 높고 푸르른 하늘을 바라다보며 자유롭게 비상하는 꿈이 있게 하소서 꿈을 말하고 꿈을 쓰고 꿈을 노래하고 꿈을 춤추게 하소서 이 가을에 떠나지 말게 하시고 이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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