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하 “덩굴식물”

2025년 09월 12일

덩굴식물

이산하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가다 보면, 온통 꼬인 삶뿐이다 덩굴식물이여, 나를 감고 올라가거라 오르다 지치면 내 마디에 앉아 숨을 고르고 더 오를 곳이 없으면 내 가지 타고 다른 나무로 가거라 그래서 너의 생애가 풀어지지 않는 삶의 비어로 마감하더라도 더 오를 길이 없다고 다시 내려오지 말거라
Image from Pixabay

이 시에서는 삶을 휘감는 덩굴로 인간의 생애를 말하지만, 지나치게 따뜻하지 않은 느낌이다. 오히려 차가운 체념 속에서 묘한 단호함이라고나 할까. 다른 나무를 감고 오르다 꼬여버리는 삶, 풀리지 않는 비어(空語)로 마감할지라도 다시 내려오지 말라는 말에는 위로보다 냉정한 선언이 있다.

덩굴에게 내 몸을 내주고, 마디를 쉼터로 허락하는 장면은 관대해 보이지만 동시에 무심하다. “내 가지 타고 다른 나무로 가라”는 말은 집착 없는 이별 같고, 더 이상 내게 머무르지 말라는 쿨한 거리 두기처럼 들린다. 시인은 애써 감싸거나 구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 바엔 그냥 올라가라, 끝까지 가라” 하고 말한다.

이 태도는 현실을 달콤하게 미화하지 않는다. 꼬여버린 삶은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려오지 말고, 그대로 끝까지 올라가라. 이것은 무심한 듯한 충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솔직한 격려일 수 있다.

이 느낌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시지프 신화』와도 닮아 있다.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그는 바위를 내려놓지 않고 끝까지 밀어 올린다. 덩굴 역시 길이 없다 해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허무라 할지라도, 내려오는 대신 올라가는 것. 시의 쿨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관련 글

도종환 “인연”

인연 도종환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 풀씨 하나로 만나 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 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가없이 그렇게 흐르다 옛적 만나던...

더 보기...

정유찬 “살아있는 날엔”

살아있는 날엔 정유찬, 「행복한 여운」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환상이고 슬퍼도 울 수 없으면 고통이며 만남이 없는 그리움은 외로움일 뿐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아쉬운 아픔이 되고 행동이 없는 생각은 허무한 망상이 된다. 숨 쉬지 않는 사람을 어찌 살았다 하며 불지 않는 바람을 어찌...

더 보기...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이별이 슬픔에게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말하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헤어짐은 절망이 아니다 차오르는 슬픔아 차라리 날선 시선으로 울컥울컥 심장을 찔러다오 무력한 자존심이 바닥까지 비워지면 흐뭇하게 가슴을 내어주마 속절없는 상처야 단단히 아물어라 다가올 그리움 아프지 않게 Image...

더 보기...
댓글 0개
댓글 작성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