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 “벼”

2025년 10월 16일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 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 이성부

Source: Pixabay

이성부의 「벼」는 한 알의 곡식이 아니라, 함께 기대며 살아가는 인간 공동체의 상징으로서 ‘벼’를 노래했다. 시인은 벼가 바람과 비에 흔들리면서도 서로를 묶고 지탱하는 모습을 통해, 연대와 겸손, 그리고 생의 고요한 숭고함을 보여준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는 구절은, 벼가 무르익으며 점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겸손'의 상징이라기보다, 더 이상 스스로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서로의 어깨에 기대는 생의 모습이다. 익어감이란 그만큼 짊어져야 하는 무게를 누군가와 함께 나누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상태다. 벼는 그렇게 이웃의 벼에 몸을 기대며 넘어지지 않으려 하고, 그 모습 속에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지탱해주는 연약하지만 따뜻한 생의 진실을 느끼게 한다.

혼자서 자기 무게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약함에도 벼는 쓰러지고 또 일어서며 견디는 모습은 사람의 삶과도 닮아 있다. 누구나 바람에 휘청이고, 너무 무거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 기대며 다시 일어서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이 시는 그 단단한 생명력과 더불어, 스스로의 아픔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존재의 의지를 보여준다.

벼의 고개 숙임, 쓰러짐은 체념이나 유약함이 아니라, 버티고자 하는 조용한 강인함의 몸짓이라는 생각.

관련 글

도종환 “인연”

인연 도종환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 풀씨 하나로 만나 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 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가없이 그렇게 흐르다 옛적 만나던...

더 보기...

정유찬 “살아있는 날엔”

살아있는 날엔 정유찬, 「행복한 여운」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환상이고 슬퍼도 울 수 없으면 고통이며 만남이 없는 그리움은 외로움일 뿐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아쉬운 아픔이 되고 행동이 없는 생각은 허무한 망상이 된다. 숨 쉬지 않는 사람을 어찌 살았다 하며 불지 않는 바람을 어찌...

더 보기...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이별이 슬픔에게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말하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헤어짐은 절망이 아니다 차오르는 슬픔아 차라리 날선 시선으로 울컥울컥 심장을 찔러다오 무력한 자존심이 바닥까지 비워지면 흐뭇하게 가슴을 내어주마 속절없는 상처야 단단히 아물어라 다가올 그리움 아프지 않게 Image...

더 보기...
댓글 0개
댓글 작성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