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숙자 “11월을 맞으며”

2025년 11월 01일

11월을 맞으며

조금은 차분해진 마음으로
조금은 겸손해진 마음으로
조금은 따스해진 마음으로
두 발로 우뚝 선
건강한 너를 맞는다
두 사람이 마주선 듯
다정한 11월
서로에게 기대며
서로 감싸주며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길을 걸어가는
다정한 연인을 닮은
너를 배우고 싶다
험한 눈보라가 몰아쳐도
세찬 비바람이 불어 와도
두 발로 힘차게 버티며
미동도 하지 않을 너이기에
너를 닮아가고 싶다.

- 안숙자

Source: Pixabay

이 시는 숫자 ‘11’의 형상으로 부터 11월의 의미를 찾아낸 시라고 생각한다.

먼저, 시인은 '11'월을 두 발로 우뚝 선 건강한 사람의 모습으로 바라본다. 곧게 선 두 개의 ‘1’은 흔들림 없는 자세이자, 자기 자신을 지탱하는 인간의 의지를 상징한다. 이처럼 시인은 숫자라는 추상적 형태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11월을 살아 있는 존재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다정하게 마주선 두 사람, 그래서 서로에게 기대고 감싸주고 같은 곳을 향하는 다정한 연인으로 '11'월을 본다.

마지막으로는 모든 어려움을 만나도 굳건히 버티는 강한 두 발을 가진 '11'월로 상상한다.

‘두 발로 서 있는 건강한 너’, ‘두 사람이 마주선 듯 다정한 11월’, ‘같은 길을 걸어가는 다정한 연인’, ‘세찬 비바람에도 버티는 너’ - 이런 일련의 이미지들은 모두 숫자 ‘11’에서 연상되는 시적 상상이다.

시인은 11월을 한 해의 끝자락에 고요히 서 있는 사람, 혹은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 함께 길을 걷는 연인으로 형상화하고, 그 안에서 홀로 서는 힘, 그리고 함께 서는 따뜻함을 동시에 배우는 '11'월의 시.

관련 글

최옥 “너의 의미”

너의 의미 최옥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가는 바람에게도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때는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너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더 보기...

고정희 “지울 수 없는 얼굴”

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더 보기...

서덕준 “아침의 단막극”

아침의 단막극 서덕준 동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흔들리는 들풀과 어귀의 꽃잎들이 모두 네게로 불어오면 좋겠다 아침 안개는 너의 가는 길에 은빛 카펫이 되고 새의 지저귐은 너를 깨우는 자그마한 연주가 되면 좋겠다 달이 잠시 무대의 뒤로 사라지고 화려한 단막극이 시작되듯 쏟아지는...

더 보기...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