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청혼”

2025년 12월 19일

청혼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귀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화려한 꽃다발이나 반짝이는 보석 대신 젖은 흙내음과 오래된 골목의 정취가 묻어나는 편지를 받은 기분이 드는 시.

이 시는 소란스럽게 사랑을 외치지 않는다. 그저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라는 첫 문장처럼, 익숙하고 편안하며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조용하게 다가온다. 오래된 거리는 낡았지만, 그만큼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공간이다. 자신의 사랑을 그런 깊이와 세월을 간직한 공간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리라.

여름날 빗소리를 "작은 은색 드럼"이라고 표현한 부분에서는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순수함이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바닥에 그 빗방울을 두드려주겠다는 약속은 거창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고 다정하다.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 올 미래에도 아첨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꾸밈없는 진심을 보여준다. 사랑 앞에서 비굴해지거나 과장하지 않고, 오직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당신을 대하겠다는 단단한 태도가 믿음직스럽다.

특히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를 찾아 팔에 적어주겠다는 구절이 참 아름답다. 금방 터져버려 사라진 줄 알았던 순수한 꿈들과 약속들을 다시 찾아주겠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헤매던 시간을 모두 돌려주겠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껴안겠다는 뜻처럼 들린다. 내가 나를 찾기 위해 방황했던 그 외로웠던 시간조차 이제는 너를 사랑하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듯하다.

시의 마지막 연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릿해진다.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라는 말에서, 사랑은 달콤함만이 아니라 쓰라림까지 감내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슬픔이 "투명 유리 조각"처럼 물컵에 담겨 있다는 표현은 서늘하면서도 아름답다. 보이지 않지만 날카로운 슬픔조차 삼켜내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느껴져서다. 이 청혼은 단순히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삶의 고통과 슬픔까지도 당신을 위해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숭고한 고백이다.

오래된 거리처럼 묵묵히 곁을 지키며, 투명한 슬픔까지도 함께 마시겠다는 이 차분한 목소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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