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을…”

2026년 05월 03일

소명과 책임 사이

He didn’t doubt the calling was high, but bad behaviour was not part of it.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을 담보로 모든 책임을 벗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식의 오만은 질색이었다. (중략) 그 역시 예술의 숭고함을 의심치 않았지만 부당한 행동은 예술의 일부가 아니었다. 한 세기에 한두 명 정도 예외는 있을 수 있다. 베토벤 같은 사람 말이다.

- 이언 매큐언(Ian McEwan), 암스테르담 -

Source: Pixabay · ACpixl

이 문장은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소설 암스테르담(Amsterdam, 문학동네) 78쪽에 나오는 클라이브 린리(Clive Linley)의 내면 독백이다. 핵심 내용의 영어 원문은 “He didn’t doubt the calling was high, but bad behaviour was not part of it”이다.

중략된 문장들을 포함한 전체 내용은 이렇다.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을 담보로 모든 책임을 벗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식의 오만은 질색이었다. 클라이브의 친구들 중에는 필요할 때마다 천재라는 으뜸패를 내세우며 여차하면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부류가 있었다. 그들의 부재로 인해 어떤 불상사가 벌어진다 해도 그건 단지 직업 성격상 불가피한 일이며 그런 연출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부여받은 소명을 더욱 우러러보게 할 뿐이라고 믿었다. 이들은-그중에서도 소설가가 최악이다-친구와 가족들에게조차 작업시간뿐 아니라 조는 시간, 산책시간을 비롯하여 침묵하는 매 순간과 우울증과 만취상태가 모조리 변명의 여지가 있는, 고도의 목적을 담은 행위라는 믿음을 주려고 집요하게 애쓴다. 클라이브가 보기에 그건 평범함을 감추려는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 역시 예술의 숭고함을 의심치 않았지만 부당한 행동은 예술의 일부가 아니었다. 한 세기에 한두 명 정도 예외는 있을 수 있다. 베토벤 같은 사람 말이다."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암스테르담(Amsterdam)은 1998년 부커상(The Booker Prize)을 받은 작품이다. 부커상(The Booker Prize) 공식 소개는 이 작품을 “어두운 유머를 지닌 소설”로 설명하고, 클라이브 린리(Clive Linley)를 영국의 유명 작곡가, 버넌 핼리데이(Vernon Halliday)를 유력 신문 편집자로 소개한다. 두 인물은 몰리 레인(Molly Lane)의 장례식에서 다시 만나고, 이후 우정과 경쟁, 도덕적 판단과 복수심이 뒤얽힌 파국으로 나아간다.

클라이브 린리는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약속을 어기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자기 기분과 침묵과 우울과 만취까지 모두 “창작의 일부”로 포장하는 태도를 경멸한다. 특히 "소설가"를(ㅎㅎㅎ). (여기서 최악이라고 표현한 소설가는 작가 자신을 말하는 것일까 작가가 상대한 다른 소설가를 말하는 것일까 궁금하긴하다.)

그는 천재라는 말이 책임 면제권이 되는 순간, 예술은 숭고한 일이 아니라 평범한 결함을 감추는 연극이 된다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오만”이다. 오만은 단지 자기를 높게 평가하는 태도가 아니라, 타인의 시간을 하찮게 보고 자기 내면만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감각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클라이브 린리를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세우기보다, 오히려 그가 곧 스스로 무너질 것임을 암시한다. 그의 약점은 “영감의 순간에 매달린 나머지 일상의 평범한 사건을 제대로 목격하지 못하는 무능”이라고 많은 서평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예술가의 오만을 경멸하지만, 훗날 자기 작품의 완성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인물이 된다. 그래서 이 문장은 선언이 아니라 복선이다. 그는 “부당한 행동은 예술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믿지만, 막상 예술과 윤리가 충돌하는 순간에는 자신이 비판한 태도와 닮아간다.

이 문장의 깊은 의미는 그들의 예술과 삶의 관계에 있다. 예술은 때로 고독, 몰입, 침묵, 불규칙한 생활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곧바로 도덕적 면책특권을 뜻하지는 않는다. 창작자는 자기 안의 소리를 듣기 위해 물러날 수 있지만, 그 물러남이 타인을 멸시하는 특권이 될 때 예술은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폭력을 숨긴다. 이 문장은 예술의 숭고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이 숭고하다면, 그 숭고함은 인간에 대한 책임을 더 엄격하게 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예술가들의 예술적 몰입은 실제로 불균형한 시간, 긴 침묵, 사회적 거리, 감정의 흔들림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모든 고립과 분리를 오만으로 볼 수는 없다. 정신적 질환이나 창작의 압박을 단순히 “평범함을 감추는 제스처”라고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다만 창작의 고통을 빙자하거나 천재성의 오만함으로 타인에게 피해나 상처를 주는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결국 이 문장은 예술이 특별하다면, 그 특별함은 더 깊은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베토벤(Beethoven) 같은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은 천재 숭배의 여지를 남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예외는 극히 드물다는 냉정한 판단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천재라는 이름은 면죄부가 아니라 유혹이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술가들에게 냉정하다. 작품은 위대할 수 있지만, 부당함까지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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