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최옥 “너의 의미”

너의 의미 최옥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가는 바람에게도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때는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너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적도 없다 아아, 찰나의 시간 속에 무한을 심을 줄 아는 너 수시로 내 삶을 흔드는 설렁줄 같은 너는, 너는. Image source: Pixabay 이 시는 아주 깊은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정현종 “방문객”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 것이다 ㅡ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마음,내 마음이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스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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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무심코”

무심코 명이나물 한 잎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데 끝이 붙어 있어 또 한 잎 따라온다 아내의 젓가락이 다가와 떼어준다 저도 무심코 그리했겠지 싸운 적도 잊고 나도 무심코 훈훈해져서 밥 먹고 영화나 한 편 볼까 말할 뻔했다. - 복효근, 『꽃 아닌 것 없다』(천년의시작, 2017) 中 재미와 미소와 감동이 있는 시. 사소한 다툼 끝에 마주 앉은 식탁의 공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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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등 뒤를 돌아보자”

등 뒤를 돌아보자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앞만 보고 달려온 동안 등 뒤의 슬픔에 등 뒤의 사랑에 무심했던 시간들을 돌아보자 눈 내리는 12월의 겨울나무는 벌거벗은 힘으로 깊은 숨을 쉬며 숨 가쁘게 달려온 해와 달의 시간을 고개 숙여 묵묵히 돌아보고 있다… 그립고 눈물 나고 사랑하는 것들은 다 등 뒤에 서성이고 있으니 그것들이 내 등을 밀어주며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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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저녁눈”

저녁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박용래 박용래 시인의 '저녁눈'을 읽으니 마음 한구석이 처연해지면서도 동시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기분이다. 시에 등장하는 '말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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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동 “단풍나무”

단풍나무 옷을 벗는 것이다 푸르고 단정하던 껍데기를 벗어 던지는 것이다 여름 날 숨막히게 내리 쪼이던 햇살 앞에서도 당당했고 온 몸에 퍼부어 대던 굵은 물줄기에도 한 점 흐트러짐 없던 푸르름 바위틈에 바람이 일고 흰 눈발 펄펄 하늘로 가는 날에도 담담하게 서있으려니 했는데 훌훌 옷을 벗는 것이다 저렇게 벗어 던지면 더 아름다운 것을 기어이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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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숙자 “11월을 맞으며”

11월을 맞으며 조금은 차분해진 마음으로 조금은 겸손해진 마음으로 조금은 따스해진 마음으로 두 발로 우뚝 선 건강한 너를 맞는다 두 사람이 마주선 듯 다정한 11월 서로에게 기대며 서로 감싸주며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길을 걸어가는 다정한 연인을 닮은 너를 배우고 싶다 험한 눈보라가 몰아쳐도 세찬 비바람이 불어 와도 두 발로 힘차게 버티며 미동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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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Frost “October”

O hushed October morning mild,Thy leaves have ripened to the fall;Tomorrow’s wind, if it be wild,Should waste them all.The crows above the forest call;Tomorrow they may form and go.O hushed Octo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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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 “그대의 발명”

그대의 발명 느티나무 잎사귀 속으로 노오랗게 가을이 밀려와 우리집 마당은 옆구리가 환합니다 그 환함 속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 나가는 이 가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한 장의 음악입니다 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들이 다 음악입니다 나는 지금 느티나무 잎사귀가 되어 고독처럼 알뜰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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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부 “벼”

벼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 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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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사람의 일”

사람의 일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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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원 “가을비”

가을비 이정원 빗방울이 떨어지고 처마가 기운다 가을에 피는 봉선화는 서럽다 꽃주머니속 씨알들이 이참에 한번 터져버릴 참이다 빨갛게 꽃물 든 가을 낮잠 흰 고무신 닦아 세워둔 나들이가 기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Source: Pixabay 이번 가을에는 비가 참 많이 온다. 어제,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이 시는 짧은 행 안에 잔잔하고 서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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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잊는 일”

잊는 일 손택수 꽃 피는 것도 잊는 일 꽃 지는 일도 잊는 일 나무 둥치에 파넣었으나 기억에도 없는 이름아 잊고 잊어 잇는 일 아슴아슴 있는 일 아슴아슴(부사) ①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은 모양. ② 기억이나 생각 따위가 또렷하지 않고 흐릿하게 떠오르는 모양. Image from Pixabay 이 시는 잊는다는 행위가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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