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시 모음
박이도 “꿈꾸는 겨울”
꿈꾸는 겨울 박이도 겨울은 침묵한다 땅속에 씨앗을 묻어두고 깊은 잠에 빠진다 풍경으로 날리는 눈발의 무게만큼 바람을 놓아준다 아, 겨울은 심심할까 얼어붙은 시간 저녁을 나는 기러기떼 아무도 말벗이 없다 눈발이 녹아 땅 속의 씨앗 소중한 생명이 솟아날 때까지는 겨울은 꿈꾸고...
전석홍 “행복 찾기”
행복 찾기 - 전석홍 - 미처 몰랐었네 그것이 행복인 줄을 하루치 땀방울 흠뻑 쏟아내고 둥지 들어 도란도란 어둠을 사를 때 지금 발 디딘 여기 이 자리 하찮은 일상에서 흐뭇함을 느낄 때 이 순간이 행복인 것을 뜬구름 잡으려 헤매는 무리들 오늘도 빈 하늘만 찾아 떠도네 가진 것 크든 작든 자리 높든 낮든 아무 상관없는 일 행복은 언제나 이름표도 색깔도...
정현종 “방문객”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 것이다 ㅡ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마음,내 마음이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복효근 “무심코”
무심코 명이나물 한 잎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데 끝이 붙어 있어 또 한 잎 따라온다 아내의 젓가락이 다가와 떼어준다 저도 무심코 그리했겠지 싸운 적도 잊고 나도 무심코 훈훈해져서 밥 먹고 영화나 한 편 볼까 말할 뻔했다. - 복효근, 『꽃 아닌 것 없다』(천년의시작, 2017)...
박노해 “등 뒤를 돌아보자”
등 뒤를 돌아보자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앞만 보고 달려온 동안 등 뒤의 슬픔에 등 뒤의 사랑에 무심했던 시간들을 돌아보자 눈 내리는 12월의 겨울나무는 벌거벗은 힘으로 깊은 숨을 쉬며 숨 가쁘게 달려온 해와 달의 시간을 고개 숙여 묵묵히 돌아보고 있다… 그립고 눈물 나고 사랑하는 것들은 다 등 뒤에 서성이고 있으니 그것들이 내 등을 밀어주며 등불...
박용래 “저녁눈”
저녁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김승동 “단풍나무”
단풍나무 옷을 벗는 것이다 푸르고 단정하던 껍데기를 벗어 던지는 것이다 여름 날 숨막히게 내리 쪼이던 햇살 앞에서도 당당했고 온 몸에 퍼부어 대던 굵은 물줄기에도 한 점 흐트러짐 없던 푸르름 바위틈에 바람이 일고 흰 눈발 펄펄 하늘로 가는 날에도 담담하게 서있으려니 했는데 훌훌 옷을 벗는 것이다 저렇게 벗어 던지면 더 아름다운 것을 기어이 보여주는...
안숙자 “11월을 맞으며”
11월을 맞으며 조금은 차분해진 마음으로 조금은 겸손해진 마음으로 조금은 따스해진 마음으로 두 발로 우뚝 선 건강한 너를 맞는다 두 사람이 마주선 듯 다정한 11월 서로에게 기대며 서로 감싸주며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길을 걸어가는 다정한 연인을 닮은 너를 배우고 싶다 험한 눈보라가 몰아쳐도 세찬 비바람이 불어 와도 두 발로 힘차게 버티며 미동도 하지...
Robert Frost “October”
O hushed October morning mild,Thy leaves have ripened to the fall;Tomorrow’s wind, if it be wild,Should waste them all.The crows above the forest call;Tomorrow they may form and go.O hushed October...
박정대 “그대의 발명”
그대의 발명 느티나무 잎사귀 속으로 노오랗게 가을이 밀려와 우리집 마당은 옆구리가 환합니다 그 환함 속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 나가는 이 가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한 장의 음악입니다 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들이 다 음악입니다 나는 지금 느티나무 잎사귀가 되어 고독처럼 알뜰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이성부 “벼”
벼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 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