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 “너의 의미”

2026년 04월 24일

A serene river reflecting a starry night sky representing deep meaning and life

너의 의미

최옥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가는 바람에게도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때는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너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적도 없다 아아, 찰나의 시간 속에 무한을 심을 줄 아는 너 수시로 내 삶을 흔드는 설렁줄 같은 너는, 너는.
Image source: Pixabay

이 시는 아주 깊은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고백을 담고 있다.

시인은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가는 바람에도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기는 존재에 대해 말한다. 형태도 없는 물과 바람에 어떻게 발자국이 남겠는가?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은 그 어떤 단단한 곳에 새긴 것보다 더 선명하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

특히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보았고,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볼 수 없다는 표현은 참으로 역설적이면서도 가슴 아프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나의 세상을 해석하는 투명한 렌즈였음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사랑하는 이가 떠난 자리에 남은 상실감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 느껴진다.

내 삶보다 너를 더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내 삶을 더 사랑한 적도 없다는 고백은 이 시의 하이라이트다. 이는 상대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너와 나의 삶이 평등하게 소중하며, 그 균형 속에서 상대를 사랑하겠다는 성숙한 사랑의 자세를 보여준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너’라는 존재를 통해서만 온전히 증명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시인은 상대를 ‘설렁줄’에 비유한다. 설렁줄은 종을 치기 위해 매달아 놓은 줄이다. 당신은 나의 삶을 수시로 흔드는, 작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다. 그 흔들림이 괴롭지만은 않다. 오히려 그 흔들림을 통해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찰나의 시간 속에서 무한을 본다.

「너의 의미」는 사랑에 빠진 순간의 설렘, 상실의 슬픔, 그리고 존재의 깨달음을 부드럽고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잠시나마 내 삶을 흔드는 '설렁줄' 같은 존재는 누구인지, 그리고 나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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